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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피해 여성 따뜻이 위로한 판사들과 검사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길” 판결문 한 줄이 큰 힘으로

"직장 내 성추행 사건은 자칫 그 특수성으로 인해 피해여성이 2차 피해를 입을 여지가 크다. 피해자는 몇 년간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이 판결 이후 피해자가 이 사건으로 인해 정신적 고통을 겪지 않길 바라고 주위 직장동료들이나 지인들도 그 피해를 이해하고 도와주길 바란다."

 

직장 상사를 강제추행 혐의로 고소했던 피해자 A씨는 이 같은 내용이 적힌 판결문을 받자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길 바라는 회사의 침묵 속에서 외롭게 싸웠던 지난 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사내에서 돌던 헛소문과 수군거림도 이겨내야 했다. 그런 그를 기나긴 고통의 터널 속에서 구해준 것은 사법부의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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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호(64·사법연수원12기) · 변성환(49·사법연수원 28기) · 임상규(39·변호사시험 1회)

 

A씨는 2일 본보를 통해 "제 시간은 그동안 성추행을 당한 그 때에 멈춰있었는데, 이번 판결은 제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작은 희망이 됐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A씨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대기업에 입사해 성실히 일했다. 그러다 2016년 끔찍한 악몽 같은 시간이 시작됐다. 26년차 회사 간부였던 B씨가 식사 자리 이후 A씨를 노래방으로 데려가 껴안고 A씨가 머물던 곳까지 따라가 성추행을 한 것이다. A씨는 회사에 이 사실을 알렸지만 오히려 '꽃뱀'으로 몰리는 수모를 겪었다. '사귀는 사이었다', '둘이 서로 좋아 재미를 봤다', 'A씨가 돈을 요구했다' 등 악의적인 헛소문이 번졌기 때문이다. 이 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까지 받은 A씨는 2년 만에 B씨를 고소했다.

 

회사 간부와 식사 후 

노래방·숙소까지 따라와 추행 


2019년 1심인 서울남부지법 형사단독재판부는 B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사회봉사 120시간과 성폭력 치료강의 40시간도 명령했다.

 

하지만 A씨는 '피고인이 자신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설명한 재판부의 양형이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엄벌을 원하는 탄원서를 써 검찰에 제출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검사들은 바빠서 탄원서 같은 거 잘 읽지도 않는다"는 주변의 말에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 알렸지만 

오히려 ‘꽃뱀’으로 몰려 수모까지


망연자실하던 A씨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 속 주인공은 1심 담당검사인 임상규(39·변호사시험 1회) 검사였다. 임 검사는 "피해자를 재판과정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재판 결과가 혹시 불만족스럽지는 않은지 여쭤보려고 전화드렸다"고 했다.

 

검사가 직접 전화를 한 것에 깜짝 놀란 A씨는 그동안 B씨의 성추행과 뒤이은 악의적 소문들로 고통받았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임 검사는 A씨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했고, 이어 항소이유서에 1심의 양형이 부당한 이유를 자세히 기술했다.

 

‘장애’ 진단받고 고소

 1심 양형이유 수용 못해 항소

 

항소심은 서울남부지법 형사1부가 맡았다. 항소심 과정에서 A씨도 탄원서를 제출, B씨의 성추행 뿐만 아니라 악의적 소문 등으로 고통받고 있음을 호소했다.

 

재판장인 변성환(49·사법연수원 28기) 부장판사는 배석판사이던 정의정(41·35기)·신동호(40·37기) 판사와 논의해 "그동안 피해자가 제출한 많은 자료와 탄원서 등을 처음부터 살펴보겠다"며 선고일을 늦췄다.

 

‘엄벌 탄원’ 고민 중 검사가 전화

 참담한 심정 경청

 

재판부는 한 달여 뒤 B씨에게 1심과 같은 형량을 선고했지만, 판결문 말미에 직장 내 성추행 사건으로 피해자인 A씨가 고통받지 않길 바란다는 의미있는 당부를 남겼다. 네 줄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헤아려준 판결문과 재판과정은 A씨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큰 힘이 됐다.

 

형사재판과 함께 B씨를 상대로 진행한 민사재판 역시 A씨에게 많은 위로가 됐다. A씨가 B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사건을 맡은 강영호(64·12기) 서울중앙지법 원로법관은 소액사건이지만 이례적으로 판시 이유를 남겨 A씨가 겪었을 고통에 공감했다.

 

강 원로법관은 "B씨의 성희롱과 성추행 및 그 이후 대응 과정에서 A씨가 심대한 정신적 고통을 당했음을 인정할 수 있으며, B씨는 이를 금전으로 위자할 의무가 있다"며 "B씨는 A씨에게 2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시했다.

 

A씨는 "이번 사건을 통해 경험한 판·검사님들은 피해자의 상황과 마음에 깊이 공감했던 분들이었고, 적어도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던 분들"이라며 "힘든 시간을 겪었지만 그 분들 덕분에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판사님들과 검사님께 감사드린다"면서 "저와 같은 고통을 겪은 피해자들에게 희망이 되는 사법부와 검찰이 되길 소망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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