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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생활 중시’ 문화 확산… 판사들, 일할 동력 찾기 어려워

1심 민·형사합의사건 미제 사상 ‘최다’ 원인과 대책

올 상반기 전국 법원 민·형사 합의부 1심 미제 사건 수가 최근 10년 동안 최대를 기록하면서 법조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여파도 크겠지만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태 이후 전개되고 있는 내부 갈등 등 전반적인 법관들의 사기 저하와 함께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을 좇는 경향이 심해지는 세태가 반영된 것 아니냐는 진단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판사들의 업무의욕을 고취시킬 마땅한 방법이 없는 상황이라 판사들의 샐러리맨화가 가속화할 것이라며, 신속하고 질 높은 사법서비스를 받아야 할 국민의 권리가 침해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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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중앙지법, 사건 처리율 '반토막'… 미제도 '급증' = 미제 사건 증가와 사건 처리율 하락은 전국 최대 규모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에서 특히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상반기 서울중앙지법 민사 본안 합의부에는 1만685건의 사건이 접수됐지만 5435건의 사건이 처리돼 처리율이 절반(50.9%)에 그쳤다. 미제 사건 수는 1만9186건을 기록해 10년전인 2010년 9376건에 비해 10년 만에 1만건가량 증가했다. 특히 상반기 기준 서울중앙지법 민사 본안 합의부 미제 사건 수는 2015년 1만483건, 2016년 9689건으로 줄었다가 2017년 1만1576건, 2018년 1만2418건, 2019년 1만4076건으로 증가세로 돌아선 후 올해 최대치를 기록했다.

 

한 고법부장판사는 "코로나19 여파로 재판일수가 줄어들었는데도 미제 사건이 이렇게까지 늘었다는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며 "1심에서 고법으로 올라오는 사건들을 보면 예전에 비해 복잡하거나 어려운 사건도 많이 줄어든 것 같다"고 했다. 

 

법관들 사기 저하

 업무의욕 고취 마땅한 방법 없어

 

또 다른 판사는 "서울중앙지법의 상황도 심각하지만 전국 법원이 대체적으로 비슷한 상황"이라며 "어려운 깡치사건들은 다음 재판부로 넘기면서 폭탄돌리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국 법원의 사건 평균처리일수도 증가 추세다. 민사 본안 합의부 사건은 2020년 상반기를 기준으로 한 사건이 처리되는데 평균 301일이 걸렸다. 10년전 222일보다 79일 늘어났다. 같은 기간 형사공판 합의부 사건도 10년전 110일보다 74일 늘어난 184일이 소요된 것으로 나타났다. 재판이 점점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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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원도 변화하는 과도기" = 이 같은 변화에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한 로스쿨 교수는 "사회 전반에서 일보다는 개인생활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흐름이 변화하고 있지만, 법관사회에도 '일하지 않는 문화'가 정착될까 우려가 크다"며 "워라밸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판사들의 지위가 낮아지고 긍지가 없어져 급격한 '샐러리맨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판사들이 일을 열심히 하거나 잘하면 승진을 하거나 대법관이 되는 등 인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그보다 줄을 서고 정치에 진출하는 등 판사 본연의 업무가 아니라 잿밥에만 관심을 보이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며 "법관 사회에 일을 열심히 할 동기가 사라지고 열심히 일하는 문화가 사라지면서 그 폐해는 오롯이 국민들에게 전가된다"고 지적했다.

 

한 변호사는 "최근 변호사업계에서는 재판의 신속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데다 질까지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며 "현 사법부가 강조하는 '좋은 재판'이라는 것이 재판 받는 당사자가 아니라 판사에게 좋은 재판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법원 사건처리 평균일수도 

10년 전 보다 79일 늘어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고법부장판사 승진 제도가 있었을 때에는 승진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했던 게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도 사라졌다"며 "예전처럼 판사들의 업무역량을 통계나 지표로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부장판사가 일을 열심히 하자고 배석판사들을 독려하면 금방 이상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니 누가 열심히 하자고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또 다른 판사는 "다면평가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은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이나 내 일을 대신 해주는 사람"이라며 "기본적인 업무를 안하고 편안한 생활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어 법원 문화가 바뀌고 있지만 이게 맞는 방향인지는 계속 의문이 든다"고 했다.

 

한 대형로펌 변호사는 "과거에는 판사가 과로사할 정도로 일을 열심히 해야했는데 이는 정상적인 조직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빨리빨리' 문화 때문인지 전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 재판은 가장 신속한 수준이었는데 판사들이 자신의 개인생활 없이 헌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는 판사들도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일한 만큼 인정·보상 원칙 지켜져야" =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법관 인력 증원, 1심 단독화, 조정 등 대체적 분쟁 해결(ADR) 활성화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한 부장판사는 "예전과는 달리 육아휴직이나 국내·외 연수 등으로 일선에서 일하는 가동 법관 수가 많이 줄었기 때문에 법관 증원이 원칙적인 해법이지만, 예산 문제 등으로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과거 예비판사 제도처럼 로클럭 제도를 활성화해 업무도 분배하고 법조인 양성 역할을 맡는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판사는 "이제는 매일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출근해 판결문을 쓰는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 같다"며 "신속한 재판을 위해서라면 현재로서는 재판부라도 늘리는 1심 단독화가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했다.

 

서울의 한 로스쿨 교수는 "재판이 지연되면 신속한 분쟁 해결을 위해 미국 등 외국처럼 ADR을 활성화하는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면서 "다만 이는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시장에 떠넘겨 국민들에게 비용을 전가한다는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주말도 출근해 

판결문 쓰는 시대로 갈 수는 없지만

근본적 개선책은

 판사 스스로 자긍심 회복에 달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이제는 사건 처리 기한 등을 정해 직·간접적으로 판사들의 업무처리를 독려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근본적인 개선책은 결국 판사 스스로 자긍심을 되찾는 데 달려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법관 사회 전반적으로 일 안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진다는 것은 큰 문제"라며 "사법행정권 남용 등 일련의 사태들로 저하된 판사들의 사기를 회복시키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판사 출신의 한 로스쿨 교수는 "엘리트주의의 폐해가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법관들은 소명의식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힘들더라도 격무를 견뎌왔다"며 "법관으로서의 자긍심조차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일을 열심히 하고 재판을 잘하면 보상이 뒤따르는 조직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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