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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지법, 판사들 적정 선고 건수 제시… “워라밸 보장”

업무개선 방안 첫 시행… 법조계 주목

수원지법이 전국 법원 가운데 최초로 판사들의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업무개선 방안을 마련해 화제다. 민·형사 합의부 등 재판부별 적정 선고 건수를 제시하는 등 업무강도 측면에서는 물론 합의부 운영 방식을 재판부 구성원들과 사전협의하도록 권고하는 등 혁신적인 업무개선 가이드라인을 마련한 것이다. 판사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해 일·가정 양립을 지원하고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을 보장하겠다는 취지다. 법원행정처 사법행정위원회 산하 법원문화개선위원회를 비롯한 업무개선 위원회나 젠더법연구회와 같은 연구회 차원에서 일·가정 양립 방안 등이 논의된 적은 있지만, 일선 법원 차원에서 이 같은 제도 개선안을 마련해 시행하는 것은 사법 사상 처음이라 수원지법의 실험에 법조계가 주목하고 있다.

 

수원지방법원(법원장 윤준)은 지난 8일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업무개선방안'을 마련해 시행에 들어갔다.

 

개선방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적정 선고 건수' 제안이다. 수원지법은 2017~2018년 선고 관련 통계 자료와 소속 판사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사무분담별 적정 선고 건수를 정했다. 그리고 기준 선고 건수의 80% ~ 110% 사이에서 선고할 것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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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민사합의부의 경우 주심별 선고 건수 기준을 월 12건으로 정한 뒤 10% 상한과 20% 하한을 적용해 월 9.6~13.2건을, 형사항소부의 경우 주심별 월 40건을 기준으로 월 32~44건을 적정 선고 건수로 정했다.

 

민사합의사건의 경우 통계 분석과 설문조사 결과 월 11.6~15.6건 선고하는 걸로 나타났는데, 권고안에 따르면 9.6~13.2건으로 줄어들어 약 2건가량 업무 경감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민사합의부 주심별 선고기준은 월 12건

 상한 10% 하한 20%로

 

이건배(55·사법연수원 20기) 수원지법 수석부장판사는 소속 법관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적정 선고 건수를 초과 또는 미달해 선고되는 경우 오히려 불이익하게 작용될 수도 있다"며 "꼭 지켜달라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법원 관계자는 "업무경감에만 초점이 있는 건 아니고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해 과도한 경쟁이나 접수건수 대비 처리율 제고라는 업무과중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윤 판사 돌연사' 계기로

긍정적 측면 제도화 바람직

 

수원지법은 이 밖에도 △평상시 휴정 여부, 동·하계 휴정일정 등 1년 단위 전체 재판 일정과 △합의일, 판결문 초고 인도일 등 주 단위 재판부 일정 △선고 일정과 건수 △신건·속행기록 검토 △판결문 작성 △재판 진행 △합의 방식 △재판연구원 업무 등 합의부 운영 관련 주요사항에 대해서도 재판장과 재판부 구성원들이 사전 협의를 거치도록 권고했다. 

 

수원지법은 바람직한 합의부 운영 방식에 대해서도 자세한 내용을 공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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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기일은 원칙적으로 3~4주 재판 후 판결 선고를 포함해 1주 휴정하는 형태로 운영하고 △재판장이 주심 판사에게 메모나 검토보고서를 작성하게 하는 것과 주심판사의 보고나 판결문 초고를 통해 사건·기록을 파악하는 것을 지양하고 △판결문 수정은 주심 판사와 미리 협의하고, 재판장의 개인적인 선호 등에 따른 수정은 지양하는 등의 내용을 권고했다. 

 

재판기일은 원칙적 3~4주 재판 후

선고 포함 1주 휴정 형태로

 

수원지법은 또 12일부터 매월 둘째, 넷째주 금요일을 '야근 없는 날'로 정해 운영하기로 했다. 사무실의 모든 불을 끄는 셧다운 같은 강제적 조치는 없지만, 법원 차원에서 사전에 안내 메일과 안내 방송 등 홍보를 통해 정시에 퇴근하는 분위기를 만들기로 했다.

 

수원지법이 이 같은 개선 방안을 마련한 것은 지난해 11월 고(故) 이승윤 서울고법 판사의 갑작스러운 사망이 계기가 됐다. 효율성과 신속성만 강조해서는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논의가 시작됐다. 

 

수원지법은 올 1월 전체 판사회의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업무개선방안'을 제안해 연구를 개시하기로 의결한 뒤, 연구반을 구성해 구체적 실행 방안을 논의했다. 수원지법 판사들은 지난 5일 법관워크숍에서 연구반 논의 결과를 토대로 토론을 벌였다.

 

12일부터 매월 둘째, 넷째 금요일은

‘야근 없는 날’로 지정도

 

판사들의 반응은 호의적이다. 한 고법판사는 "판사들도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을 겪는데, 이런 문제를 개인의 열정과 사명감만으로 극복하라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며 "적정하게 근무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고,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해야 업무에 집중해 제대로 된 결과물도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부장판사는 "법원 내부에서는 재판장이 성과를 내기 위해 배석판사들을 닦달해 업무 효율성을 쥐어짜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며 "법원 차원에서 적정 선고 건수 등이 정해지면 무리해서 일을 하는 경우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판사가 야근에 찌들어서는 국민을 위한 좋은 재판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다른 부장판사도 "합의부 운영 방식에 대해 이전에도 각 재판부 별로 논의가 있었지만, 개별로 하면 한계가 존재한다"며 "수원지법에서 마련한 방안과 그 시행결과를 면밀히 분석해 긍정적인 측면은 시스템으로 제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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