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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법조회고록

[나의법조회고록] 김태청 전 변협회장 ⑥ 거창사건

김태청 전 변협회장 -제3142호-

1951년에 발생한 '거창사건'은 한 마디로 거창사건이라고 하지만 처음에 '거창 양민학살사건'이라는 것이 있었고, 다음에 '거창 합동조사단 방해사건'이 일어났다.
그 두 개의 군법회의를 후에 병합심리하여 하나의 거창사건이 된 것이다.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 패잔병이 준동하는 지리산 일대는 낮에는 태극기가 휘날리는 대한민국이다가 밤만 되면 인민공화국으로 돌변했다.
51년 2월 그 공산잔비 소탕작전 임무를 맡은 육군 제11사단장 최덕신 장군(중국군 출신, 후에 월북)과 예하 연대장 오익경 대령, 대대장 한동석 소령 등이 빨치산들의 식량조달 등 소위 보급투쟁에 주민들이 협조했다는 이유로, 사단장이 중국군대 시절에 배웠다는 이른바 건벽청야(建壁淸野)작전(손자병법에 나오는 전술개념으로, 전략상 요충지는 확보하고 그렇지 못한 지역은 들판을 청소하듯이 초토화하여 적이 발붙일 곳이 없게 하는 작전)으로 거창군 신원면 주민 7백여명을 옥석도 안가린 채 아녀자까지 무차별 처형한 것이 세칭 '거창 양민학살사건'이다.
당시 검찰관이던 나는 연대장과 대대장 두 피고인에게 각각 사형을 구형했는데 재판부(재판장 강영훈 준장)는 감일등하여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10년형을 선고했다.
양민학살 사건이 국회에서 말썽이 되자 진상조사를 위한 국회·군·검·경 합동조사단이 그해 4월 사건현장인 거창군으로 파견됐다.
지프차 4대에 분승한 조사단이 지리산 기슭 현장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 산정 부근에 공비를 가장한 국군이 매복해 있다가 차량행렬을 향해 일제히 소련제 따발총을 발사, 혼비백산한 일행이 조사를 못하도록 방해한 것이 계엄사 민사부장 김종원 대령 지휘하에 자행된 '거창 조사단 방해사건'이다.
양민학살과 조사단방해라는 두 개의 거창사건이 병합심리된 군법회의 법정에서 자칭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 피고인은 자기의 단독범행이라고 큰 소리치던 종래의 자백을 번복하여, 당시 국방부장관 신성모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꽁무니를 뺐다.
난처해진 것은 군법회의 재판부였다.
'상관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하라'는 것이 철칙인 군대에서 피고인이 만일 장관의 명령에 복종한 것뿐이라면 그에게는 형사책임이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심히 가벼워질 수밖에 없는 법리이고 보면, 과연 그와 같은 명령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모르고서는 피고인에 대한 선고형의 경중을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임됐던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한 총애로 그 때 이미 주일대표부(한·일국교 정상화 이전 임시대사관) 대사로 부임해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증인소환에도 불응하므로 수석 검찰관인 내가 보좌관 김부남 소령을 대동하고 동경까지 출장하여 신성모의 증언을 청취해 왔다.
아직 미수교 국가였던 일본이었으므로 민간 여객항공기 편이 있을 리 없고 따라서 군사재판을 위한 특별조치로 UN군용기를 타고 갔다.
모국에서 군검찰관이 조사하러 온다는 정보를 들은 신 대사는 한발 앞서 병원에 입원하고 있어 임상신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병실에 안내되어 신 대사에게 내의를 고하였다.
그는 이름난 낙루장관-落淚長官-(이승만 대통령 앞에 나가기만 하면 항상 우국충정의 표시로 아부의 눈물을 잘 흘렸다 하여 언론에서 붙여 준 별명)답게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자기는 그때 합동조사단이 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공비를 가장하여 방해하라고 지시한 바 없다고 깨끗이 발뺌했다.
따라서 모든 책임은 김종원 피고인이 질 수밖에 없었다.
거창조사단 방해사건은 이름 그대로 '거창'하게 떠들석했지만 공비를 가장한 국군의 위협사격은 공포였기 때문에 조사단 중 누구 하나 다친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법적으로는 공무집행방해죄와 군기문란죄 밖에 안되었다.
나는 법정 최고형인 7년형을 구형했었는데 3년형이 선고되어 결국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