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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법조회고록

[나의법조회고록] 김태청 전 변협회장 ② 부산정치파동과 법무감실의 반역

김태청 전 변협회장 -제3138호-

6·25 동란 중이던 1952년 부산. 재집권을 노리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실정에 대해 야당인 한민당은 맹렬한 정치공세를 펴고 있었다.
바로 이때 모 요정에서 우발적인 총격사건이 벌어졌다. 한민당의 민권투사 서민호 의원이 쏜 권총에 역시 권총으로 서 의원을 겨누고 있던 서모 대위가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 것.
정당방위다, 아니다의 논란이 있는 가운데 서 의원은 對野 반격용 희생양이 되어 살인죄로 구속기소됐다. 그러나 국회가 석방동의안을 가결시켜 서 의원은 풀려났다.
이에 당황한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도 국회에서 부결되고 그렇게 되면 재집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무보직으로 썩고 있던 원용덕 장군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했다.
원 장군은 국회 석방결의로 풀려난 서 의원을 재수감, 육·해·공군 법무감들도 모르는 유령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그러나 뜻 있는 몇몇 장군과 법무관들은 이에 반기를 들고 항명하게 된다.
이 대통령으로부터 병력 차출명령을 받은 이종찬 참모총장은 긴급 참모회의를 소집, 이 대통령이 비록 국군 통수권자이긴 하나 일선 싸움터의 병력을 빼내 후방의 정치싸움터로 보낸다는 것은 망국의 길이라고 결론짓고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며 출병명령을 거부했다.
이렇게 되자 이 대통령은 원 장군 휘하 헌병 2개 중대 병력만으로 국회의원 전용버스를 크레인으로 끌어다가 의원들을 짐승처럼 임시의사당에 몰아넣고 소위 발췌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키는 정치적 폭거를 저질렀다.
한편 서 의원 처벌을 위해 설치된 군법회의에서 재판장을 맡은 최경록 소장은 정부 고위층으로부터 "오전 중에 심리를 끝내고 오후에 사형선고를 하라"는 협박성 메모와 함께 "승진시켜 주겠다"는 유혹도 받았지만 재판을 1개월이나 끌고 가다 전격 해임되고 말았다.
후임 재판장에 임명된 박동균 준장은 52년 7월1일 서 의원에게 사형을 선고함으로써 후세에 '춤추는 군법회의'라는 오명을 남겼다.
당시 육군대령이던 나는 대구 육군본부에서 법무감실 차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법무감은 손성겸 장군이었다.
이 대통령을 등에 업고 서슬이 퍼렇던 원용덕 장군은 손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각하의 명이니 경남지구 계엄사령부에 설치된 군법회의에 법무관을 급파하라"고 지시했다.
법무감실에서는 긴급 과장회의가 소집됐다.
손 장군과 나를 비롯해 법무과장 계철순 대령, 검찰과장 이용석 대령, 심사과장 태윤기 대령 등은 "적의 포위공격도 없고 평온하기만 한 부산에 계엄법상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선포된 사이비 불법 계엄아래, 법무감도 모르게 설치된 사생아적 괴뢰 군법회의에는 단 한 명의 법무관도 파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법무관 파견을 단호히 거부했다.
항명의 대가로 이종찬 참모총장은 즉각 해임, 육군대학 총장으로 좌천됐고 손 장군과 참모진영은 모두 박살이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법무와는 무관한 변두리로 쫓겨나 민사감실 차감이라는 한직으로 유배돼 4·19 혁명 때까지 자유당 부패정권하의 9년간 '명예로운 귀양살이'를 해야만 했다.
세월이 흘러 내가 만년대령 9년만에 4·19 덕분으로 별하나 얻어달고 제8대 법무감으로 취임한지 얼마 안된 1960년 9월19일, 원용덕 장군은 살인 혐의를 받는 피고인이 되어 내가 주관하는 중앙고등군법회의 법정에 서게됐다. 이 대통령이 반역자로 지목했던 김성주를 살해한 사실이 4·19 후 유가족들의 재수사 탄원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음으로 법정에 섰던 날로부터 1년여가 되던 1961년 9월30일, 피고인 원용덕은 또다시 같은 법정에 섰다. 자기가 저지른 살인죄의 판결을 선고받기 위해서다.
그날로부터 9년전, 부산 정치파동 때 자기가 이승만 대통령의 政敵 서민호 의원을 살인죄의 피고인으로 세웠던 군법회의 법정이었다. 또 6년 전에는 이승만의 메모 지시에 따라 김성주를 살인예비죄 등으로 서게했던 군법회의 법정이기도 했다.
그 군법회의 법정에 그날은 자신이 역시 살인죄의 피고인으로서 마지막 판결선고를 받기 위해 서 있는 것이었다.
"피고인 원용덕을 징역 15년에 처한다."
재판장 장창국 장군의 엄숙한 판결선고 주문이었다.
동기가 불순하고 방법이 잔인하고 범행후의 정상 또한 참작할 여지가 없는 살인죄로서는 그 형량이 너무 가볍다는 비난을 예상했던 것일까. 판결은 그 이유에서 피고인의 創軍 및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공로를 참작했다고 밝히고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압력으로 감행되었다는 점 등의 정상을 참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세 개의 별이 양어깨에 빛나고 왼쪽 가슴엔 오색 훈장도 찬란한 군복을 입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권세는 어디로 가고 15년 징역형이 선고된 피고인 원용덕은 푸른 囚衣를 걸친 囹圄의 몸이 되어 영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