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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법조회고록

[나의법조회고록] 이선중 전 법무부장관 ③ 대구사법보호회 사건

이선중 전 법무부장관 -제3132호-

1961년7월부터 1962년4월까지 대구고검 차장검사로 재직할 때의 일이다.
처음으로 설치된 중앙정보부 대구지부에서 얼마전까지 대구지검 검사장이었던 김사룡씨를 업무상횡령 등 혐의로 구속·송청하였다. 범죄내용은 지방검사장은 그 지역의 사법보호회장(지금의 갱생보호공단 지부장)을 겸임하고 있었는데, 사법보호회 예산 얼마인가를 사용처불명 등 이유로 횡령하였다는 것이다.
구속·송청이 되자 대구지검 검사장 이봉성씨와 차장검사 김일두씨는 숙의 끝에 대구지검에서 처리하기가 난처하다고 한 것 같았고, 검찰총장의 특명으로 필자가 처리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김사룡씨가 검사장일 때 이봉성씨는 차장검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때 부장검사이었는데도 퇴근후의 시간에 송청되는 김사룡씨를 직접 신문하고 처리하였다. 그때부터 이봉성씨와 김일두씨는 필자의 사무실에 붙어 앉아서 "그 정도의 범죄사실로서 구속을 계속하기에는 심하지 않느냐, 석방하여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돌아가지 아니했다. 필자는 야심한데도 검찰총장 장영순씨 댁으로 수없이 전화하여 석방에 대한 사전승인을 받을 생각이었는데, 밤 12시까지도 부재중이어서 통화할 수도 없고 하여 큰 결심으로 석방하고 불구속수사하기로 하였다. 다음날 총장에게 보고하고 수사한 후 기소유예처리하였다.
5·16혁명 후 처음으로 설치된 중앙정보부에서 부정부패를 척결한다는 혁명공약대로, 첫 사건으로 송치한 사건을 검찰이 단독으로 석방한데 대해 중앙정보부는 몹시 괘씸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중정대구지부는 김사룡씨를 석방한 것을 부당한 처사로 결론짓고 필자의 비행을 캐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중정 대구지부에서 동원한 경찰관들이 찾아낸 필자의 부정사실은 어지간히 세밀하였다. 대구시내 근무가 세 번째인지라 대구에서의 업무상비행, 독직 등 여러모로 조사한 것 같은데 별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중정 대구지부가 필자의 비행이라고 당시 상부에 보고했던 내용은 이러하였다.
① 6·25 당시 김천 고향에서 어모면 인민위원회위원장이던 의사 예모씨에 대해 대구지방검찰청 김천지청에 청탁하여 불기소하도록 한 것은 직권남용이다. 내용을 설명하자면 예모 의사는 6·25 사변 후 1950년7월말 인민군이 진주하자 초대 인민위원장이 되어 약 10∼20일간 근무하였다. 당시 필자의 선친은 서울에 있는 필자의 아내와 생후 10개월된 손자를 데리러 가기 위해 여행증명서가 필요했으므로 예모 의사에게 부탁해 이를 발부받아 걸어서 서울을 다녀오셨다. 9·28 수복 후 이 사실을 김천지청장에게 말씀드리고 그 분의 부역행위에 대한 처벌이 없도록 했다. 부역행위처벌법 운용지침에서는 부역자라고 하더라도 우익관계인사 또는 그 가족들에게 해를 가하지 아니하고 도움을 준 부역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지침이 있어서 김천지청은 그것을 적용하여 불기소한 것이었다.
② 국가보안법위반죄로 구속기소한 노인에 대해 공소취소한 것이 잘못이다. 설명하자면 국가보안법 중 헌법기관에 대한 모욕죄가 신설된 지 얼마 후 엿장수라고 하는 어느 노인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불만으로 욕을 한다는 것이 "오래 오래 살아서 벽에 똥칠을 할 때까지 살아라"고 노상에서 말하였다고 하여 헌법기관인 대통령에 대한 모욕죄에 해당되어 국가보안법위반죄로 구속송청되었는데, 본인의 자백과 증인의 진술로서 사실이 인정되어 구속기소하였으나 좀 과하다고 생각되어 4·19 이후 공소취소한 바가 있었다.
③ 간첩방조 혐의가 있다. 내용인즉, 대구지검 부장검사가 된 후에 모교인 김천중학교 동창회 대구지부의 지부장은 1회 졸업생 김모씨였고 7회 졸업생인 필자가 부지부장이었다. 연 1회 정도 총회가 있을 때 만난 일이 몇 번 있는 지부장 김모씨는 6·25때 납북되었다가 탈북한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탈북할 때 간첩활동의 지령을 받고 왔으며 대구에서 필자와 만나 정보를 얻은 후에 이북에 밀송하였다는 것이었다.
④ 부정축재 혐의가 있다. 설명하자면 장인이 대구에 조그마한 집을 샀는데 미등기상태인 때이어서 그것은 형식뿐이고 필자가 집을 사서 부정축재한 것이라는 내용이다(후에 장인 명의로 등기되었음). 중정 대구지부는 이를 상부에 보고하고 법무부에도 통보했다. 대검찰청에서는 유태영 검사가 직접 조사에 착수했다. 위 네가지 사실은 결론적으로 범죄가 되지 아니하거나 과장되었다는 것이 판명되어 아무 처벌이나 조치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 검찰인사 때 으레 대구지검 검사장이 되어야하는데, 비록 동기이기는 하여도 나의 후임으로 간 광주고검 차장검사 김선씨(후일 법무차관도 나의 후임임)가 대구지검 검사장이 되고 나는 광주지검장으로 밀려났다.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이 되었는데 그 바람에 광주, 대전, 대구로 각 지방을 두루 근무할 수 있었다.
한편 같은 시기에 부산지검 검사장이시던 양모씨도 부산사법보호회의 예산을 횡령했다고 하여 구속수사를 받고 부산지검으로 송청됐었다. 당시 부산지검은 그대로 구속기소하였으나 후일 무죄가 선고되었다. 후에 대검찰청에 들어가서 장영순 검찰총장에게 다른 일로 업무보고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분은 부산에서의 무죄선고 사실을 말씀하시며 대구에서의 지혜와 용기를 칭찬하시고 부산에서의 잘못을 한탄한 바가 있었다.
정리=최성영 기자 choisy@law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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