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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법조회고록

[나의법조회고록] 이선중 전 법무부장관 ② 3·15 부정선거 수사(하)

이선중 전 법무부장관 -제3131호-

국무위원 15명을 처리하여야 하겠는데 여러 가지로 고민 끝에 부정선거 당시의 내각사무처 처장이었던 신두영씨(후일 감사원장)를 불러서 국무회의에서의 상황을 상세히 심문하였던 바, "이승만 박사에 관한 투표결과의 집계가 전 투표 유권자의 95%가 나온 것은 역사적으로 너무 심한 사례에 속하므로 70% 정도로 수정발표하자"고 한 당시의 내무부장관 최인규씨의 발언과 몇 사람의 찬성으로 전 국무위원의 동의하에 처리하였다는 요지의 진술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을 기초로 각 부 장관을 한 사람씩 심문하였던 바, 송인상씨는 신두영씨가 그렇게 말하였다면 틀림이 없다고까지 진술하여 대체로 모든 국무위원의 진술을 확보하고 전원 구속기소하기에 이르렀다.
10여명의 장관들을 검찰청사에서 구속한다면 비록 야심한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큰 소동이 날 것이므로 구속 당일 밤 9시를 전후하여 모두 서소문에 있는 서울구치소 소장실로 출두하도록 하고 거기에서 개별심문조서를 작성하고 이것을 첨부하여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구속 수감하였는데 다음날 일제히 신문에 보도되었다. 사전에 구속영장을 신청하여도 되겠지만 영장 신청서가 법원에 접수되면 전부 출입기자에게 탐지되어 큰 소동이 날 것을 우려한 처사였다.
혹시나 하고 당시의 국무회의 회의록을 입수하여 검토하였으나 회의록이라는 것이 안건(주로 무슨 법률안 개정안)표시와 가결통과로만 간략하게 되어 있었고, 구체적인 발언내용은 일체 기록이 없었으며 투표 증감부분은 본회의 후에 여담으로 한 것으로 한마디의 언급이 없었다.
위 사건은 필자가 처리하였고 공소장 역시 작성하였으나 그후 광주고검 염창렬 검사가 같이 수사하기로 되어 기소검사는 염창렬 검사 이름으로 된 것으로 안다.
1960년 말에 헌법개정으로 소급처벌하도록 하였고 전국 검사중 여럿이 특별검찰부를 구성했으며, 5·16 후 혁명검찰부로 바꾸어서 오랫동안 3·15 부정선거사건을 조사하였으나 그후의 혁명재판소의 판결문을 보면 필자의 공소장 기재가 그대로 선고되어 있었다.
이에 앞서 위 사건은 1960년10월8일 서울지방법원 장준택 부장판사 재판부에서 공소권이 없다고 하여 면소판결이 선고되고 일부 석방되었다. 위 사건을 수사하고 기소한 필자는 "3·15 부정선거를 처벌하는 대통령선거법이 당시의 헌법을 전제로 대통령직선제이었던 것인데, 1960년6월15일 헌법이 개정되어 대통령 직선제는 폐지되고 대통령은 간선제로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되어 있어 자동적으로 부정선거 등을 처벌할 수 있었던 대통령선거법은 폐지되었다. 따라서 범행 후 법령의 개정이나 폐지로 형벌이 폐지된 경우에는 면소판결을 하여야 한다고 규정된 형사소송법의 규정이 있으니 기소해 보았자 면소판결이 고작"이라는 견해를 몇 번 밝힌 바가 있었다.
그러자 검찰이나 법무부의 상부에서도 이 점이 걱정되었던지 당시의 법무부 고위층의 담화, 기타의 형식으로 3·15 부정선거에 관한 처벌규정은 살아 있다고 하였고, 그것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거기에 필자의 이름은 없었어도 3·15 사건을 처리하던 검사의 문제제기가 있어서 법률이 살아 있다고 밝힌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법원에서 면소판결이 선고되자 정부나 국회는 몹시 당황하였고, 범죄는 행위당시의 법률만으로 처벌하는 것이고 행위후의 법률로는 소급하여 처벌하지 못하도록 한, 소위 죄형법정주의 헌법이 있는 한 3·15 부정선거는 처벌이 불가능하게 되고 모두 석방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0년10월11일 3·15 부정선거 관련자들에 대해서는 형벌불소급의 원칙이 배제된다는 내용의 헌법개정안이 공고되고 11월11일 국회를 통과했으며, 1960년11월12일 국회는 민주반역자임시처리법을 준비하여 통과시키고 1960년11월13일 부정선거 관련자들은 재수감돼 급한 불은 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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