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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상혼'

진광근(서울남부법무사회) 법무사

삼성 창업주 이병철, 두산의 박승직과 함께 10대 경제인으로 꼽히는 소설의 주인공 조병택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중에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단 10년 만에 조선 최고의 거부가 된 인물이다. 주인공 명의로 사정(査定)받은 870필지의 땅을 찾는 소위 '조상 땅 찾기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하나 둘 튀어나온 그의 행적은 놀라운 것이었다. 지금의 전국경제인연합회에 해당하는 조선상공회의소 초대 두취(모임의 으뜸인 사람)와 한일은행장을 지낸 그가 친일을 하지 않고 오히려 항일단체에 자금을 지원하고 민족교육사업, 민족자본의 창달을 위한 은행을 설립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토록 훌륭한 위인이 왜 역사 속에 묻힌 채 1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을까?

일제강점기, 역사를 부정당하고도 많은 사람들이 눈을 내리깔던 시대였다. 감추고 싶은 이야기만 있을 뿐 자부심이 없던 시대였다. 하지만 주인공의 용기는 의(義)로웠고 정의는 올곧았다. 그는 시대의 어둠을 밝힌 한줄기 빛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소설로 쓸 수밖에 없는 단순명료한 이유였다. 일제강점기 경제를 연구하는 몇몇 학자들과 만나고 그의 삶의 궤적을 살피며 나는 세 가지에 집중했다. 주인공의 성공을 향한 원시적인 열정, 시류의 흐름을 한시도 놓치지 않은 장사꾼으로서의 능력, 최고의 상인임에도 친일을 하지 않았다는 점.

마라톤 풀코스 42.195km중 40km는 인간이 달리고 나머지 2.195km는 신이 달리는 것이라고 한다. 소설이 풀리지 않을 때는 끝이 보이지 않는 42.195km 주로를 떠올렸다. 턱밑 숨까지 끄집어내어 달리며 육신의 고통과 정신의 고통을 인내했다. 그렇게 2011년에 '파'라는 제목으로 소설이 출간되기까지 2년이 걸렸지만 작가의 책은 곧 묻히고 말았고, 2년이 흘렀다.

책을 출간하고 2년이 흐른 2013년, 뜻밖에 연락을 받게 되었는데 도서관 구석에 잠들어 있던 '파'를 우연히 발견하여 읽어 본 출판사 사장의 연락이었다. 출판사 사장은 흥분해있었다. 광풍이 휘몰아치던 시절, 경제인이라면 친일을 해도 그다지 흉이 되지 않을 시기에 그것도 최고 상인의 지위에 있으며 친일을 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토록 위대한 선조를 기억하지 않는 것은 후손으로서 직무유기라며 반드시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했다. 다만 독자들을 처음부터 책에 몰입할 수 있게 하려면 하이라이트를 책의 앞부분으로 가져오고 조금 더 각색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제시했다. 내 의식이 집약된 소설을 각색하자는 출판사 사장의 제의가 마뜩찮았으나 결국 8개월간에 걸쳐 각색을 했고, 2014년 '상혼'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출간되었다.
출간 후 조정래 작가의 정글만리와 한동안 베스트셀러 경쟁을 펼쳤고 드라마 외주제작 업체에서 드라마 제작을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은 작가의 입장에서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시대를 앞서 살았던 주인공의 삶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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