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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라운지 커버스토리] '민족소송' 주도 지익표 변호사

일제 강점기 겪은 법조계 증인

지익표(90·고시 9회) 변호사는 일제 강점기의 비탄(悲歎)과 광복의 환희(歡喜)를 생생히 기억하는 세대의 법조인이다. 그는 지난 20년간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징용·징집 피해자, 사할린 동포 등 일제 피해자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민족소송'을 주도하고 일제 잔재 청산 국민운동에 앞장서는 등 공익·인권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비록 소송에서 졌어도 민족적인 족적과 소중한 소송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좁은 나라에서 내편, 네편 나누지 말고 보다 큰 마음으로 화합하라"고 당부하는 그는 이 시대의 어른이지만, 팔순의 나이에 '비행(飛行)'에 도전한 '열혈 청년'이기도 하다. 지난달 22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지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올해 70주년을 맞는 광복절의 의미와 민족소송에 헌신한 그의 90년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70년전인 1945년 8월 15일. '광복(光復)'의 그 날은 당시 만 20세로 갓 성인이 된 청년에게도 새 생명을 얻은 것처럼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법조계의 존경받는 원로 지익표(90·고시 9회) 변호사 이야기다. 지 변호사는 당시 일제로부터 해군 영장을 받은 상태였다. 그는 3년전인 1942년 독서회 사건에 연루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됐었다. "당시 일본 해군은 망해가는 판국이었기에 입대하기만 하면 10명 중 8~9명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만 18세 미만의 소년이라는 이유로 풀려나긴 했지만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감시까지 받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유를 찾았다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전남 완도에서 태어난 그는 서른 살이 되던 1955년 제9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늦깎이로 합격했다. 광주지법에서 6년간 판사로 근무하다 법복을 벗고 변호사로 일하던 그는 1983년 러시아 사할린을 찾았다가 '사할린 동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동포들의 딱한 사정을 듣고 변호사 6명과 함께 사할린을 방문했습니다. 동포들의 삶은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눈물을 많이 흘렸죠. 일제 강점기에 강제 노역으로 그곳에 끌려가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통을 당했는데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싶어 귀국 후 대한변협 차원에서 소송을 준비했습니다. 일본의 양심 있는 변호사들도 돕겠다고 해 함께 뜻을 모았죠." 이후 대한변협 사할린분과위원장을 맡은 그는 1992년 일본 정부의 불법 강제이주 책임을 묻는 위자료 청구소송을 일본 법원에 냈다. 162명의 변호사들이 10만원씩 보태 소송비용을 댔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일본 정부가 소송취하를 조건으로 32억엔(320억)을 사할린 동포의 이주·정착을 위해 내놓았다.

日해군 영장 받는 20세, 8.15 광복으로 ' 새 생명'
30살에 고시사법과 합격… 판사 6년 후 변호사로 
83년 사할린 방문으로 日상대 '민족소송'과 인연

소식을 들은 태평양 전쟁 피해자, 위안부 피해자, 강제징용자 등 수많은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지 변호사를 찾아왔다. 그는 1992년 대일민간법률구조회를 만들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일합방 침략 및 불법지배 무효소송과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에는 각 피해 분야별로 원고 369명과 보조참가자 1069명이 참여했다. "1965년의 한일조약과 협정은 양국간의 수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고 피해 보상도 받고 하는 게 수교조약인데, 정작 내용을 들여다보면 잘못했단 말이나 배상이란 단어는 하나도 들어있지 않아요. 조약을 제대로 체결했더라면 이런 소송도 없었겠죠. 우리 정부도 책임이 있어요. 전쟁의 책임은 전혀 묻지 않고 협정을 맺었으니까요. 일본이 전쟁만 안했어도 우리나라가 이렇게 분단은 안됐죠. 전쟁에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우리나라가 두동강이 나고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싸우는 민족상잔의 아픔을 겪게 되고 지금까지도 얼마나 피해가 많나요. 그 책임은 다 일본에 있습니다. 그 책임을 물은 '민족소송'이었습니다."

소송 준비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원고 369명의 의견서와 소송비용 구조를 위한 문건 등을 한글로 작성한 뒤 다시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 법원에 제출하는 과정을 일일이 거쳐야 했다. 법정 통역비용과 일본을 오가는 항공료와 체류비 등 관련 비용은 모두 지 변호사가 사재를 털었다. "일본말을 잘하는 사람이 없어 전부 내 손으로 밤이고 낮이고 번역하고 교정도 수없이 했죠. 보통일이 아니었어요. 스무살 때 해방을 맞아 일제 강점기 피해자의 설움을 잘 압니다. 변호사가 돈만 벌면 변호사가 아니죠. 다른 사건은 거의 못하고 내내 매달렸어요. 국제법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어서 스스로 책을 사서 공부하고 모르는 건 대학 교수님들께 물어보면서 배웠습니다."

지 변호사 본인도 피해자여서 선정당사자로 소송에 참여했다. 그는 법정에서 "일본이 잘못은 했지만 일본이란 국가가 미워 소송을 내는 게 아니다. 한일 관계의 조약이 잘못됐기에 소송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가 빨리 마무리돼야지 그렇지 않으면 양국 모두가 불리하다. 잘못한 건 사죄하고, 국제법에 따라 원상회복을 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피해자들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던 말들을 일본 법정에서 토해냈다.

사할린동포 강제이주 위자료 청구, 32억엔 성과
92년 대일민간법률구조회 결성… 본격소송착수
재판에는 패했지만 소송기록은 역사적 자료로

하지만 11년을 끌던 일본 법원은 2003년 피해자들을 끝내 외면했다. "동경지방재판소와 동경고등재판소는 법리로나 증거상으로는 회피할 수 없는 분명한 사안들에 대해서도 단 한사람의 증인조차 채택하지 않은 채 청구를 기각했어요. 최고재판소도 6개항에 걸친 상고이유에 대해 단 한마디의 판단도 없이 판결이 아닌 결정으로 상고를 기각해버린 폭거를 감행했죠. 이런 일본의 행위는 국제법상 재판거부에 해당되기 때문에 일본의 과거사 책임은 아직도 상존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도발과 불법지배로 우리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습니다. 그 책임은 국제법규에 따라 사죄, 원상회복, 손해배상의 방법으로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는 점을 후속 세대에게 꼭 부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의 한일 관계는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했다. "한일관계는 꼭 정상화돼야 합니다. 한차원 더 높이 생각해 가까이 지내야지 아니면 양쪽이 모두 손해입니다."

지 변호사는 일제 강점기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거의 마지막 세대다. 그는 자신이 쓴 국제법 이론과 관련 논문, 민족소송 기록과 관련 자료 등을 정리해 후세들에게 전하고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콤팩트 디스크(CD) 등으로 만들어 놓았다. 당초 대일소송의 목적 역시 일본의 배상책임을 묻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에게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될 역사적 기록을 남겨주겠다는 데 있었다고 했다. "우리나라가 독립이 안 됐으면 나는 아마 살 수 없었을거에요. 일제시대에 영장을 받아서 죽을뻔한 목숨이었는데 살았죠. 우리가 똑똑해서 변호사가 된 것 같지만 광복이 없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거에요. (민족소송에) 관련된 사람도 많고, 일도 많고, 염려도 많았죠. 결과는 별거 아닌거 같지만 할말 다 하고 자료도 남기고 후회 없이 했어요. 사비를 들여 소송비용을 댔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아요. 가진 돈이 많진 않지만 그래도 부족한 건 없어요. 자랑할 것은 없지만 지금까지 살아 온 길에 대해, 비록 소송에선 졌어도 민족적인 족적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입니다."

90세인 지금도 매일 사무실 출근 화해사건 처리
하늘 날고 싶어 팔순에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 따 
고향 완도까지 비행이 최장 기록… 국제항로 도전

구순인 그는 지금도 아침마다 사무실로 출근한다. 화해 사건을 전문으로 맡아 처리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35건의 화해사건을 수임했다. "내가 밥먹고 쓸 정도는 스스로 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아직도 '열혈 청년'이다. 사무실 한켠에는 비행기 시뮬레이션을 연습할 수 있는 각종 장치들과 커다란 모니터가 설치돼 있다. 지 변호사는 국내 최고령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 보유자로도 유명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시뮬레이션으로 비행 연습을 하고 있다. 비행을 시작한 이유를 묻자 "넓은 하늘을 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왜 좁은 나라에서 이편 저편 가르고 서로 싸우며 사는지, 보다 큰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시작했어요. 옛날에는 비행기나 헬리콥터를 배우려면 미국에 가서 6개월 가량 체류해야 해 배우지 못했는데, 국내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이 생겨 마음을 먹을 수 있었죠." 10년전인 2005년 팔순의 나이에 조종사 자격증을 따 고향인 완도까지 하늘길로 다녀왔다. 그가 세운 최장거리 비행기록이다. 비행사로서의 그의 목표는 국제항로에 도전하는 것이다. "경비행기를 몰고 일본도 가고 중국도 가고, 그리고 구라파(유럽)에도 가고 싶어요. 100살이 넘든, 어떻게 되던간에 할 수 있는 날까지 도전해 보려 합니다. 한번뿐인 인생을 시시하게 살 순 없잖아요."(웃음)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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