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법조라운지

[법조라운지] 한국언론법 분야 산증인 박용상 언론중재위원장

"최선 다해 행동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할 수 있으면 행복"

리걸에듀
박용상(70·사시 8회) 언론중재위원장의 인생 역정은 우리나라 언론의 자유와 언론법 발전의 궤적과 일치한다. 8년 차 판사로 근무하던 1980년 언론기본법 제정 작업에 참여해 언론중재위원회 탄생에 공헌한 그는 34년이 흐른 올해 언론중재위원회의 수장이 됐다. 그동안 언론으로 인해 풍파도 많이 겪었다. 2001년 헌법재판소 사무처장으로 근무할 당시 헌법재판관 후보로 거론됐지만, 언론기본법 제정 작업에 참여한 이력 등이 문제가 돼 막판에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언론 자유를 신장하고 언론법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이 분야의 태두(泰斗)로 평가받는 박 위원장을 지난달 25일 세종대로 프레스센터에서 만났다. 70세의 나이에도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는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지나간 일보다는 앞으로 언론법 발전을 위해 저술활동에 욕심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행복이란 게 사람마다 다르고 주관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행동하고, 그 다음 주어진 것에 만족할 수 있으면 그게 행복이지요. 만족하지 못하거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어요. 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일이고, 저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그렇게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저를 보는 시각이 그럴 수도 있으니까요."

박용상(70·사시 8회) 위원장은 언론법과 언론의 자유를 연구한 선구자적 법조인이다. 하지만 언론으로부터 따뜻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외부에서 바라본 자신의 모습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 맞서기도 싶고, 한편으로는 서운해할 법도 한데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지나간 일에 연연하기보다는, 내가 이룬 학문적 성과에 대한 평가,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저술활동에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72년 판사로 임관 후 언론법 분야에 관심
임관 3년 만에 독일 유학, 1년3개월 공부
80년 신군부 '언론기본법' 초안 작업 참여

박 위원장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 서울형사지법 판사로 임관했다. 당시 많은 법률가가 민법, 형법에 관심을 보인 반면 헌법 분야 중에서도 언론의 자유에 관심을 갖게 된 이력이 독특하다. 70~80년대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던 당시 정치 상황에서 언론의 자유를 학문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판사에 임관한 지 3년 만인 1975년 독일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1년3개월간 연구할 기회를 얻은 것도 언론법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는 밑거름이 됐다.

"언론의 자유에 관한 법은 헌법에 몇 개의 조문이 있을 뿐 조문화된 단일 법률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언론의 자유에 관해서는 여러 분야에서 수많은 판례와 학설이 전개되고 있었고, 이를 체계적·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 일을 정리하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판사로서 언론의 자유와 언론법제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자 그를 찾는 곳도 많았다. 그는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제정한 '언론기본법' 초안 작업에 참여했다. 당시 언론기본법에 담긴 반론권 제도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기관으로 언론중재위원회의 설립을 도입한 것은 순전히 그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공공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보도를 한 언론사에 대해 등록취소를 할 수 있도록 한 독소조항이 포함돼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는 악법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치명적인 독소조항인 등록취소 조항에 반대했지만 힘이 미약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보도지침' 사건이나 방송의 정치적 이용을 감행하는 등 신군부의 언론억압정책은 법을 무시하고 법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추구됐어요. 당시 저는 도저히 법적으로 뒷받침 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지요. '후에 언론기본법이 폐지되면 이 조항 때문인 줄 알라'는 얘기까지 했는데도 그들은 강행했습니다." 언론기본법이 발효되자 법제정 작업에 참여한 박 위원장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신문의 정체성은 논조와 경향성에서 나와
그에 의한 보도·논평이 신문의 자유 핵심
신문에 공정의무 부과는 신문의 자유 훼손

언론법에 관한 그의 활동은 25년 뒤인 2005년 헌법재판소 심판정에서도 펼쳐진다. 2005년 신문법에 관한 헌법소원 사건으로,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변호사로서 유일하게 법정에 선 사건이다. 2005년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언론개혁입법으로 제정한 신문법은 신문에 대해 방송과 같이 공정보도의무를 부과했다. 그는 이 의무 조항이 신문의 자유의 본질을 훼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문의 정체성은 논조와 경향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또 그에 의해 보도·논평하는 자유가 헌법상 보호되는 신문의 자유의 핵심입니다. 2005년 신문법은 신문의 윤리적 관행을 법적 의무로 부과해 헌법상 다양성의 원칙과 언론의 자유의 요청에도 배치되는 것이었죠. 언론법을 평생 공부한 사람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들이 그를 더욱 '보수성향' 인물로 비치게 만들었다. 과거 그는 직장 내 성희롱 사건으로 6년간의 법적 공방이 계속된 '서울대 우조교 사건'에서 항소심 재판장을 맡았다. 1심, 항소심, 상고심, 파기환송심 가운데 항소심을 맡은 그는 성희롱의 범위를 엄격히 봐야 한다며 유일하게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이 판결은 여성단체들의 반발을 사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1990년 전교조 활동을 이유로 파면된 교사들이 사립학교법에 대한 위헌심판제청 신청을 냈지만 이를 기각해 기피신청을 당하기도 했다.

한때 헌법재판관 유력후보 물망 올랐지만
보수성향 재판 이력이 결정적 걸림돌 작용
'정권 안보' '체제 안보' 이제는 구분돼야

그는 1997년 서울고법 부장판사에서 헌법재판소 사무차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2001년 헌재 사무처장을 맡았다. 그는 당시 유력한 헌법재판관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박 위원장은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시절 초대 노동 전담 재판부 재판장을 맡았고, 법원행정처 초대 송무심의관을 지내 법원 내부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었다. 하지만 보수 성향의 재판 이력은 그가 헌법재판관이 되는 데 결정적인 걸림돌로 작용했다.

"사람들이 나보고 보수성향이라고 말하죠. 우리나라는 정권 안보와 체제 안보에 대한 구분이 없었습니다. 체제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정치적인 반대파를 탄압한 게 예사였죠.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헌법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정하고 있습니다. 극좌인 공산주의, 극우인 파시즘을 모두 배격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보수라는 식으로 판단 받고 있어요. 나는 법학자로서 국민의 인권과 질서가 언제든지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난 이것을 철저히 이야기할 뿐이지, 특별히 한 쪽에 치우친다는 평가를 받고 싶지는 않아요. 언론의 자유도 마찬가지예요. 국가안보와 언론보도의 관계에서 진보적 입장에서는 자유주의적 입장을, 보수적 입장에서는 질서유지와 통합적 기능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형식적·대립적 입장은 한국의 헌정상황의 진전에 따라 지양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박 위원장은 2008년 '명예훼손법'을, 2013년에는 '언론의 자유'를 펴냈다. 이 두 권의 책은 우리나라 언론법과 언론 자유에 관한 내용을 망라해 집대성한 것이다. 그는 언론중재위원장으로 근무하는 2017년까지는 주어진 책무에 충실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학문적 욕구는 감추지 못했다.

"정보보호법과 관련한 책을 쓰고 싶어요. 디지털 시대에서 개인정보와 저작권, 불법정보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고 있습니다. 최근 유럽 사법재판소가 잊혀질 권리를 인정한 판결도 내놓았죠. 앞으로 디지털 시대의 문제를 다루는 법 분야가 크게 성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법률가들이 새로운 역할을 해 줄 시대가 왔어요. 언젠가는 이 분야를 다룬 책을 꼭 쓰고 싶습니다."

<글=신소영 기자, 사진=백성현 기자>

종합법무관리솔루션

관련 법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