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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재 변호사의 변호사뎐(傳)

[최승재 변호사의 변호사뎐(傳)] 변호사, 그리고 사다리

반송동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은 만나서 흔히 하는 질문 중의 하나가 고향이 어디냐는 것이다. 그러면 내 고향은 부산이라고 답한다. 필자가 경북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고향이 대구라고 생각하였다고 말하곤 한다. 필자가 경북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 것은 대구가 고향이어서가 아니다. 경북대학교만 특정한 과목이 아닌, 필자가 원하던 지적재산권법, 공정거래법, 회사법을 아우르는 융합전공으로 IT법으로 교수직을 제안하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곳은 부산시 해운대구 반송동이다. 태어난 곳은 부산 동(東)대신동인데, 대학 입학 전 기억을 하는 대부분의 시간은 반송동에서 보냈다. 당시 반송은 부산의 끝자락에 있어서 산을 하나 넘어가면 경상남도가 나왔다. 반송은 부산지역에서 도시 개발 중에 발생한 철거민들이 모여서 사는 동네였다. 쟁반처럼 생긴 소나무(盤松)의 마을인 반송은 부산에서 가난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 어린 시절이 불행하였던 것은 아니다. 모두 열심히 살았고, 조그만 것이라도 나누려고 하시는 어머니는 나눔은 있어서 나눌 만큼 가져서가 아니라, 나누려고 해서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하지만 밖의 시각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 윤리시간, 필자와 학급 친구들은 가난한 동네에 사는 학생이라는 오직 그 이유만으로 체벌을 받았다. 정말 지워지지 않는 아픈 기억이다. 하지만 더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할 때 고등학교 진학 연합고사에서 만점을 받았다. 가난도 시련도, 심지어 어이없는 매질도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고 나는 그 때 다짐했다. 나는 오로지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할 때만 불행해지는 것이라고.

설국열차의 끝

오랜 만에 고향친구를 만났다.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이 친구가 설국열차의 꼬리 칸에 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서 그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 물었더니,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영화란다. '설국열차'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장편소설 '설국(雪國)'은 읽어봤지만, 설국열차는 처음이어서 대충의 줄거리는 들어보니, 기상 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지구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운 기차 한 대가 끝없이 궤도를 달리고 있는데, 그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설정이란다. 앞 쪽은 선택된 사람들이 술과 마약까지 즐기며 호화로운 객실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고, 뒷 칸은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하루하루의 삶을 겨우 영위하고 있다. 열차 안의 세상은 불평등 그 자체이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지 17년이 지난 시점에 꼬리 칸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가 이러한 불평등한 상황을 깨기 위해서 오랜 시간 준비해 온 폭동을 일으켜, 꼬리 칸을 해방시키고 기차 전체를 해방시키기 위해 절대권력자 윌포드가 있는 앞쪽 칸을 간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프랑스 작가의 원작을 봉준호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는데, 친구 말로는 잘 만들었다고 한다.
꼬리 칸이라고 하니, 중학교 시절 국어선생님께서 선물로 주신 책이 기억난다. '트라나 포올리나'라는 작가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이다. 애벌레가 태어나서 자신이 바라본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인 애벌레 탑으로 올라가려고 한다. 최선을 다해서 한발 한발 올라간다. 수많은 애벌레들이 원하는 것처럼 저 꼭대기 위로 동료들 보다 더 빨리 더 높게 올라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올라갈수록 힘이 든다. 수많은 애벌레들이 있던 아래와 달리 위에는 이제 애벌레들의 수도 적다. 어느 날 그 꼭대기까지 올라간 애벌레들의 운명을 보게 된다. 힘이 밀려서 그 꼭대기에서 아래로 추락하는 것이다. 그 때 그 애벌레는 결심한다. 내려가자, 그리고 언젠가 애벌레 탑으로 가기 전에 들었던 이야기, '나비가 되라'는 말을 상기하고 고치를 감고 인고의 시간을 보낸 뒤 마침내 나비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나를 아껴 주셨던 그 국어선생님을 경북대학교 교수가 된 뒤에 수소문해서 찾았다. 아직 나비는 되지 못했지만, 설국열차 뒤 칸의 나에게 나비의 꿈을 심어준 분을 만나고 싶었다.

사다리

변호사가 되는 방법을 로스쿨로 바꾼 것은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말들이 나온다. 장하준 교수가 2004년에 쓴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에서의 논의가 우리 사회라는 열차를 둘로 나누는 수단으로 로스쿨 담론에 들어온 것 같다. 변호사를 어떤 방식으로 선발할 것인가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사회적 자본의 축적방식에 대한 담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변호사가 된다는 것이 사다리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인가는 사다리의 존재가 사법시험 때에는 있었던 것인 지에서 시작하여야 할 이야기인 것 같다. 사법시험으로 뽑아도 변호사를 사회적인 적정 수요 이상으로 뽑으면 결국 스스로 자본력이 없는 변호사는 여전히 그 사다리 위로 오르기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 논란이 있다는 것은 사회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어떤 방식이건, 사회적인 사다리는 필요하다. 그래야 세상에 희망이 있다. 그것이 나비가 되는 꿈이건, 애벌레 탑 위로의 꿈이건 간에. 호접지몽(胡蝶之夢)일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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