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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라운지] "승률 0% 후회는 없다" 1세대 '인권변호사' 홍성우

"겁 많은 사람이지만 '守天心'의 자세 지키려 노력"

'승률 0% 변호사'. 한때 사람들은 홍성우(76·고시13회) 변호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법 암흑기'인 유신과 5공화국 시절에 수많은 시국사건을 맡아 변론했지만 한차례도 무죄판결을 이끌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시작으로 김지하 사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간첩단 조작 사건 등 20여년 동안 굵직굵직한 사건에서 활약하며  70년대에 '인권변호사'라는 말을 만들어 낸 주인공이다. 인권변론의 외길을 굽히지 않고 걸어온 그가 최근 법을 통해 국가와 사회 발전에 공헌한 사람에게 주는 영산법률문화상을 수상했다. 홍 변호사를 지난달 23일 서울 양재동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나라고 왜 좌절감이 없었겠어요. 한두번 절망한 게 아니에요." 사람들은 홍성우(76·고시13회·사진)  변호사에게 묻곤 했다. "뻔히 유죄판결 날 걸 알면서 뭐하러 며칠 밤을 새며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 그는 유신과 5공 시대에서 긴급조치, 집시법 위반으로 기소된 수많은 대학생과 노동자, 지식인을 변호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결과는 언제나 유죄였다. "하지만 '이왕 유죄판결 나는 거 열심히 하면 뭐해' 하면서 대강 할 수는 없었어요. 무리한 기소라는 걸 알면서도 당연히 유죄판결이 나겠지 하고 '관대한 처분 바란다'는 말이나 한다면 가만히 앉아 있는 법원, 검찰하고 다를 게 뭐 있겠어요. 그 사람들이 꿰어 맞추려는 재판에 '변호사도 있었다'는 요식절차를 갖춰주기 위한 들러리 밖에 안 되는거죠." 양심범으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너희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니 유죄를 받더라도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며 소신과 용기를 지켜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스스로를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평하는 그가 이처럼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인권변호는 겁이 나더라도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법관 사직 큰 이유는 사법파동 보다 경제 문제
우연히 찾아온 민청학련사건이 인권변론의 계기
5·18후 '지식인 선언' 서명하고 한때 도피 생활

홍 변호사는 고(故) 이돈명·황인철 변호사, 조준희 변호사와 더불어 '인권변호사 4인방'으로 불린다. 1986년에는 한승헌, 고 조영래 변호사 등과 함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전신인 정의실천법조회(정법회)를 결성했다. 법관이던 그가 임관 6년만에 사표를 내고 변호사로 개업한 것에 대해 혹자들은 '사법파동' 사건 때문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장 컸다"고 했다. 아내와 4남매, 부모와 동생들을 비롯해 많은 가족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업 3년째가 되던 1974년 여름, 민청학련 사건을 맡고부터 큰 변화가 찾아왔다. "우연히 만나 빠져든 거죠. 그 사건을 하면서 내가 해야할 일이 이런 건가 보다 하는 생각을 했고 자연히 열심히 하게 됐어요. 그러다보니 긴급조치 위반이나 집시법 위반 등으로 구속되는 학생과 지식인, 노동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저를 계속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5·18 민주화 운동 이후 전두환 신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했을 당시'지식인 선언'에 서명을 하고 도망을 다녀야 하기도 했다. "당시 긴급조치위반을 이유로 사람들을 무작위로 잡아넣었죠. 두어달 동안 도망다니다 잠잠한 것 같아 집에 갔는데 결국 안전기획부에 잡혀갔어요. 2박3일 동안 조사를 받고 강제로 휴업계를 쓰고 나왔는데 당시 문인구 서울통합변호사회장이 이런 사정을 알았는지 중간에서 그걸 보류했어요. 참 고마웠죠." 하지만 휴업계를 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에게 사건을 맡기러 오는 사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사무실 밖에서는 정보원으로 보이는 낯선 사람이 그의 사무실을 드나드는 고객들을 검문하기도 했다.

시국사건 수없이 맡았지만 결과는 언제나 '유죄'
故 김수환 추기경이 정신적 물질적 도움 많이 줘
좋은 사람 만나는 것이 결국 인생의 맛이고 보람

 
눈 앞이 캄캄하던 그 때, 고 김수환 추기경과 주위의 따뜻한 손길이 그를 도왔다. 김 추기경은 "이 일은 평생 비밀로 해야 된다"고 당부하며 그에게 독일 돈 2만 마르크가 든 봉투를 건넸다. 우리 돈 600만원 가량으로 당시 상당히 큰 돈이었다. 독일의 어느 주교를 찾아가 '어려운 친구를 꼭 도와야 할 일이 있는데 용도는 묻지 말고 달라'고 해서 만들어 온 돈이라고 했다. "김 추기경님이 워낙 잘해주셨어요. 그 분은 인권변호사가 아주 대단한 사람인줄 아셨어요(웃음). 정신적·물질적으로 도움 받은 게 참 많아요."

어느 날은 낯선 얼굴의 한 의뢰인이 그를 찾아와 수임을 부탁했다. 내용을 보니 그리 어렵지 않으면서도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기쁜 마음에 냉큼 사건을 맡고 나자 대체 누가 이런 좋은 사건을 자신에게 소개해준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떻게 나를 알고 찾아왔느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법관으로 계신 어느 분이 찾아가보라고 했다면서 자기 이름은 절대로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가 승소하고 받은 사례금은 그동안 진 빚을 한번에 갚을 수 있을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판사들이 제게 미안한 감정 같은 걸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정치사건 이외의 다른 사건에서는 되도록 유리하게 도와주고 호의적으로 해주려는 눈치도 있었죠."


 

그는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을 맡은 것에 대해 "그때 용기를 냈던 건 내 인생에서 참 잘한 일"이라고 회고했다. "풀이 죽어서 2년 동안 실의의 세월을 보내던 때에 사람들이 '반미폭동', '빨갱이들의 소행'이라고 비난하는 살벌한 상황에서 변론 부탁이 왔는데 고민을 많이 했죠. '우리가 과연 저 걸 할 용기가 있나' 고민하다가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는 생각에 결국 하기로 했어요. 만약 그때 꺾이고 좌절해서 포기했더라면 내가 어떻게 됐을까 싶어요. 그때 활동이 내 인생에서 빠졌더라면 난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인간이 됐을 거에요."

어느 새 많은 시간이 지나 그가 변론했던 대학생들은 변호사나 교수, 국회의원, 잘나가는 사업가 등으로 성장했다. 이들 중에는 정초가 되면 그의 집에 새배를 오는 이도, 주례를 부탁한 이도 있었다. 그는 주례를 설 때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는 싯구로 시작하는 마종기 시인의 '우화의 강'을 즐겨 낭독한다. "뒤돌아보면 나름대로 보람도 있고, 실패도 있고, 고생도 했고, 많은 굴곡을 겪었죠. 그저 한 생각의 편린에 불과하겠지만 결국 인생을 사는 것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맛이고 보람이라고 생각해요. 서로 대화하고 입장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인생의 의미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많이 깨닫고 발견했죠."

홍 변호사는 66세가 되던 지난 2003년 식도암 수술을 한 뒤 송무활동을 정리했다. 역삼동에 5평 남짓한 오피스텔을 얻어 이 곳에서 책을 읽고 지인들을 만난다. 사무실 벽면에는 '守天心(수천심)'이라고 쓴 서예 작품이 걸려 있다. '지학순 주교' 사건을 변론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지인이 20여년전 직접 써서 준 선물이다. "저걸 보면서 그 분이 무슨 뜻으로 저걸 나에게 써줬을까 생각했어요. '하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계속 탐구하면서 그걸 지키려고 노력하는 길을 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어요."
 
인권 변론활동,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면 안 돼
젊은 변호사들, 사회에 공헌하는 길 찾아 봤으면…
이제 남은 과제는 '인권변론자료집' 출간 마무리

그는 '인권변론자료집' 출간을 마무리 짓는 일을 자신의 남은 과업으로 꼽았다. 영산법률문화상을 수상하며 받은 상금 5000만원도 출판 비용에 전부 보탤 예정이다. 그는 긴급조치로 양심범 재판에 대한 언론보도가 금지되자 민주화 투쟁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공소장과 판결문 등 재판기록을 모았다. 그런 마음으로 20여년간 모아온 것이 라면박스 10상자 분량이다. "한인섭 서울대 교수의 도움으로 다행히 자료를 정리하고 전산화해서 자료집을 펴내고 있어요. 후배 변호사들이 많이 도와줘서 70년대 자료까지는 출간을 했는데 앞으로 남은 18권의 비용이 고민이에요. 다행히 이번에 받은 상금으로 일부는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여전히 걱정이에요."

1세대 인권변호사로서 후배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그는 "인권변호 활동을 정치에 입문하거나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이용하려 해서는 안 되며 정치적인 목적에 이용당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또 지금이야말로 인권변호 영역을 여러 갈래로 확대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제는 변호사들 스스로가 공익적 역할을 개척하면서도 최소한의 경제적 소득을 얻을 수 있는 분야와 시스템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면서 직역을 넓혀야 해요. 변호사라는 직업이, 자본주의 시대에서 변호사로 성공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환멸스러운 데가 있거든요. 젊은 변호사들이 큰 로펌에 들어가서 대기업이나 부유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에만 관심 갖지 말고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지키고 사회에 공헌하는 새로운 길을 찾아봤으면 좋겠어요. 변호사의 활로가 거기에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내가 이런 사건을 하니까 몇십년을 신나게 버텼지 돈벌이만 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글=장혜진 기자, 사진=백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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