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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라운지

[법조라운지] 올 한국법률문화상 수상 권오곤 ICTY 재판관

"젊은 법조인들, 국제기구 등 더 넓은 세상에 도전해야"

송상현, 권오곤, 박선기, 정창호, 백진현, 故 박춘호. 이들의 공통점은 우리나라가 배출한 국제재판소 재판관이라는 점이다. 이들 중에서도 권오곤(60·사법연수원 9기) 유고전범재판소(ICTY) 재판관은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선거를 통해 재판관이 된 첫 법조인이다.
권 재판관이 국제재판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개척정신'과 '화합'이라는 두 가지 남다른 유전자(DNA)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법관들이 판결을 손으로 직접 쓰던 시절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해 판결문을 처음 작성했고, 지금은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를 통해 세대와 국경을 가리지 않고 소통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연구부장 시절에 영장실질심사제 도입과 한정위헌결정의 효력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법조계가 사분오열 됐을 때 판사와 검사 출신 연구관, 자체 연구관의 화합과 조화를 이끌어 내 헌법재판소의 연구기능 강화에 큰 공을 세웠다. 세계 평화를 위해 설립된 재판소에서 근무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한국법률문화상 수상을 위해 일시 귀국한 권 재판관을 지난달 22일 서초동 법률신문사 회의실에서 만났다.

권오곤(60·사법연수원 9기·사진) 재판관은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자주 소식을 나눈다.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가족과 함께한 일상이 가득 담겨있다. 사진이 하나 올라올 때마다 공감 표시인 '좋아요'가 수십 개씩 달린다. 1953년 태어나 올해로 환갑이 된 그는 컴퓨터를 전문가 수준으로 능숙하게 다룬다. 우리나라 판사 중 워드프로세서로 판결문을 처음으로 작성하기도 했다.


페이스북·SNS 통해 서울 친구들과 소통
올해 환갑이지만 컴퓨터는 능숙하게 다뤄
판사 중 처음 워드프로세서로 판결문 작성


"초임판사 때 청와대 파견을 나갔다가 워드프로세서를 처음 접했어요. 그 이후로 프로그램이 어떻게 발전됐는지 꿰고 있을 정도로 관심이 많았죠."

새로운 일을 배우는 데 주저함이 없는 태도는 탄탄대로가 보장된 국내 법관으로서의 길을 두고 국제 재판관에 도전한 그의 이력과도 꼭닮은 꼴이다. 진취적인 성품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외국회사에서 근무하셨어요. 어쩌면 제가 외국에서 일을 하게 된 것도 아버지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죠. 아버지는 영어를 저보다 유창하게 구사하셨어요.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닌데 독학으로 공부해서 6·25 때 통역을 하셨을 정도였죠."

부친도 네덜란드와 연이 깊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 네덜란드 회사인 필립스 한국지사에서 10년 동안 근무하고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해외투자 유치청 고문으로 10년을 일했다. 권 재판관이 꼬박 열두 해를 네덜란드에서 보낸 것을 생각하면 네덜란드와 권 부자의 인연이 보통이 아니다.

"아버지는 영어사전을 뜯어 먹어가며 공부를 할 정도로 열성적인 분이셨고, 어머니는 서울대 불문과를 나와 자식 교육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죠. 좋은 부모님 밑에서 유복하게 자라 감사하게 여기고 있어요."

국내서 안정적 삶보다 ICTY 재판관 도전
유창한 영어보다 내 뜻 충실히 전달 노력
부친도 필립스支社 근무 네덜란드와 인연


그러나 그는 정해진 제도권 안의 안정적인 삶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사법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 법관 생활을 시작하자 주변에서도 자연스럽게 "때가 되면 대법관을 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국제연합(UN) 총회에서 하는 ICTY 재판관 선거에 나서겠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만류하고 가족들도 선뜻 내켜 하지 않았다.

"집사람은 아마 제가 개업해서 돈도 좀 많이 벌길 바라고 있었던 것 같아요. 동료들도 '왜 굳이 힘든 길을 가려 하느냐'고 말렸고요. 그러나 전 남들이 하지 않는 일에 도전하는 게 더 보람있다고 생각했어요. 아내는 제가 떨어지면 낙담할까 봐 위로해 줄 준비를 하고 있었대요. 그런데 덜컥 붙어버렸죠."

모두가 놀란 결정이었지만 권 재판관 본인에게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이미 오래전부터 외국생활에 대해 뜻을 품고 있었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는 외교대사가 있었는데, 제가 연수원을 졸업하고 초임판사 시절이었을 거에요. 그분이 '장래 희망이 뭐요?'라는 질문을 하셔서 '대법관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더니 그분이 '세계의 대법관을 꿈꿔보는 건 어때요?'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이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항상 그 말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죠."



판사로 임관된 이후 84년도에 하버드에서 1년간 공부했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외국에서 체류한 일은 없었다. 고등학생일 때는 공부를 잘해 영어도 곧잘 한다는 평을 들기도 했으나 회화를 자유롭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당장 외국어로 재판을 해야 한다는 일에 걱정이 태산처럼 몰려왔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이었어요. 헤이그에 가기로 결정된 후에 영어를 못해 걱정이라고 친구에게 털어놨더니 '피고인이 걱정이지 네가 왜 걱정이냐'고 하더군요." 그는 "지금도 깡으로 하고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국제재판소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와 불어다. 피고인들은 대부분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크로아시아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전문 통역사가 붙어서 영어나 불어로 번역한다.

"처음엔 영어가 자연스럽지 못하니 일단 듣고 있었어요. 그때가 증거조사 하던 때였는데 법리적인 검토를 하는 부분에서도 제가 나서지 않으니 다들 이상하게 여기더군요. 판사의 의견이 나와야 당사자들이 그게 맞춰서 준비를 하거든요. 그때 알았어요, 꼭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지 않더라도 내 뜻을 당사자들에게 충분히 전달하는 게 중요하단 걸요."

헤이그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한국에서 하던 식으로 소송관계인을 대했다가 깨달음을 얻은 적이 있다.

"검찰에 한국계 미국인이 있길래 반가워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었거든요. 근데 상대방이 굉장히 곤란해하는 거에요. 알고보니 검찰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이 재판부와 식사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거절했다고 하더라구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 뒤로는 '공정하게 보이는 것'을 그의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다. "실제로 공정한 것도 중요하지만 공정하게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부정한 얘기를 주고받거나 타협을 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로서 이미 공정성을 잃었다고 봐야합니다. 재판의 엄정함은 그런 기본적인 원칙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권 재판관은 한국 형사재판이 다른 나라보다 효율적으로 운용되는 점을 장점으로 꼽으면서도 역사적인 발전 과정이 없었다는 부분은 문제점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형사재판은 영미법과 대륙법의 장점을 조합해 효율적인 사법권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훌륭합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를 통해 받아들였다는 게 단점이에요. 예를 들어 서구에서 보장하는 '피고인의 인권'은 우리도 알고 있지만, 체감하는 게 달라요. 서구는 피로써 쟁취한 권리이기 때문에 그 권리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죠. 우리는 말로는 무죄추정을 부르짖지만 실제로는 유죄추정을 하죠. 국민 감정이 '억울한 1명은 어떻게 되더라도 못된 놈 10명을 어떻게든 잡자'라는 쪽에 가까운 편이에요."

외국 재판관과 의견조율은 매일 새로운 도전
ICTY 판사 펠로우 도입… 한국판사 6명 연수
2년 후 임기만료… 귀국해 후진 양성이 소망


다양한 국가에서 온 재판관과 재판을 위해 의견을 조율하는 것도 매일 새로운 도전이다. 영미법도 대륙법도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어서 절충안을 만드는 것이 매번 과제다. 그는 "세계 유수의 법조인들이 머리를 짜내서 서로 논의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매일 새로운 판례를 만들어낸다"며 "서로 토론하는 것이 굉장한 즐거움"이라고 평했다. 한국인 재판관이 더 많이 진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ICTY에서 판사 펠로우 근무제도 도입했다. 우리나라 법원에서 판사를 보내 1년씩 국제재판소 연구관으로 근무하게끔 하는 제도다. 그는 "대한민국 법관이기에 국제재판관도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 보은한다는 생각으로 자리를 마련했다"며 "지금까지 6명의 판사가 ICTY에 연구관으로 다녀갔는데 이런 게 축적되면 우리나라의 재산이 되는 만큼 젊은 판사들의 용기있는 도전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권 재판관의 ICTY 임기는 2015년 7월에 만료된다. 다른 국제 기구에서 국제재판관으로 활동해달라는 권유도 있지만, 그는 교단에 서고싶은 마음을 피력했다.

"네덜란드에서 20년을 꽉 채우는 것도 생각해보고 있어요. 그런데 아내가 타지 생활을 점점 힘겨워하는 게 마음에 걸려요. 한국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고 싶은데 2015년이면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때라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에겐 아직도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기운이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글=홍세미 기자, 사진=백성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