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클래식 산책

[클래식 산책] 악성(樂聖) 베토벤

유현정 변호사(서울변회 클래식동호회)

얼마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급작스런 서거가 있었다. 고인의 정치인, 대통령으로서의 세세한 공과는 별론으로 하고, 법조 후배로서 법조인 출신의 첫 대통령이셨던 고인의 명복을 빈다. 고인의 사후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수십만의 국민들이 사저에 문상을 갔고, 사저에 가지 못한 사람들은 광장에 분향소를 마련하여 조문을 하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음악가 중 사후 엄청난 조문행렬이 있었던 음악가는 누구일까. 바로 악성 베토벤이다. 베토벤은 1827년 그의 나이 57세 때 사망했는데, 빈에서 거행된 베토벤의 장례식에는 무려 2만여명의 조문객들이 참석하여 위대한 음악가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다. 지금보다 인구도 적고 교통도 불편했던 180여년 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숫자인데, 한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병마와 싸워가며 홀로 쓸쓸하게 지냈던 이 위대한 음악가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조금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다. 베토벤에 대해서는 2008. 12. 18.자 칼럼에서 간단히 소개한 적이 있지만, 지금 그 삶의 궤적에 대해 다시 한 번 짚어보고자 한다.

베토벤은 1770년 독일 본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에 빠져 가세가 기울자 열한살 때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고, 모친이 사망한 17세에 가장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베토벤은 음악뿐 아니라 문학, 철학, 역사 등 여러 분야의 지식과 교양을 쌓고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고, 특히 당시 프랑스혁명과 계몽주의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교향곡 3번에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달았다가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자 격분하여 보나파르트라고 적은 표지를 찢어버리고 ‘에로이카(영웅)’로 고쳤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22세에 음악의 도시 빈으로 간 베토벤은 피아노 연주자로 이름을 떨쳤으며, 하이든의 제자로 작곡공부에도 열심이었다. 하이든 외에 베토벤의 스승으로는 장크트슈테판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 알브레히츠베르거, 황제 직속 음악감독 살리에리가 있다. 살리에리는 ‘아마데우스’라는 영화에서 모차르트와 자신을 비교하며 한없이 괴로워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음악가로서 승승장구하던 20대 후반 베토벤은 귀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었고, 이는 음악가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베토벤은 1802년 10월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쓸 정도로 고통스러워 했지만 삶에 대한 강한 의지로 고통을 이겨내고 가장 위대한 작품들을 청력이 상실한 상태에서 창조해 내었다.

‘나를 다시 불러온 것은 오로지 나의 예술이었어. 아마, 나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불러내기 전에 이 세계를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이 비참한 생존을 견디고 있는 거지(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중).’

베토벤은 이전의 작곡가들과는 달리 귀족들에게 후원은 받았지만 그들에게 예속되지는 않았고, 유럽 각국의 출판사들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여 판매했다. 이는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한데, 음악가가 왕이나 귀족에게 고용되어 주문에 맞추어 음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고 싶은 음악을 만들고 스스로의 작품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베토벤의 작품에는 이와 같이 감내하기 힘든 고난들을 열정을 통해 극복하고, 기존의 틀을 깨고 예술가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 낸 그의 삶의 궤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베토벤의 삶을 떠올리며 그의 작품을 감상해보면 그 깊이와 감동이 더욱 커질 것이다.
리걸에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