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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곤 회고록] 제1화 : 헤이그에서의 15년

한국 판사 최초로 국제재판소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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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곤 전 재판관 프로필]

권 전 재판관은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7년 제19회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했다. 이후 1979년 서울민사지법 판사로 임관해 대구고법 판사, 법원행정처 법무담당관, 법원행정처 기획담당관, 대법원 재판연구관, 창원지법 부장판사, 대구고법 부장판사 등 22년간 판사로 재직하다 2001년 한국인 최초로 UN 총회에서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 국제재판관으로 선출됐다. 2008~2011년에는 ICTY 부소장을 역임했다. 2016년 ICTY 재판관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사법정책연구원 운영위원회 위원장, 대법원 형사사법 발전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2017년 1월에 제15대 한국법학원장으로 취임했으며 같은 해 12월부터 2021년 2월까지 국제형사재판소(ICC) 당사국 총회 의장을 역임했다. 2020년 11월부터 2021년 9월까지 법무부 강제실종방지협약 이행입법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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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별 리셉션의 감동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 이하 ‘ICTY’ 또는 '재판소')"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맡았던 카라지치 사건의 판결 선고일이 2016년 3월 24일로 정해지고, 귀국일도 그 엿새 뒤로 정해지자, 당시 주 네덜란드 한국 대사관의 최종현 대사가 고맙게도 2016년 3월 4일 저녁 시간에 헤이그 시내의 데장드 호텔 (Hotel Des Indes)에서 나를 위한 송별연을 열어 주었다. 헤이그에 소재한 여러 국제재판소의 재판관들과 직원, 외교 사절, 각종 국제기구 직원,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가까이 지낸 인사 등 300여 명이 참석한 성대한 행사였다.

식순에 따라 최 대사의 인사 말씀에 이어 송별사를 했다. 그중 다음과 같은 대목을 말하던 중이었다:
“한국에서는 법관의 인사이동 때문에 여러 번 이사를 했기 때문에, 네덜란드 헤이그가 내가 성인이 된 이후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이고, 이제는 제2의 고향과 같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내 인생의 가장 황금기인 마흔여덟 살부터 예순세 살까지 15년의 기간을 국제법의 수도라고 하는 헤이그에 바친 셈이다. 나도 이에 상응해서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많이 배웠고, 이제 비록 헤이그를 떠나지만, 헤이그에서의 경험에 터잡아 국제형사법 제도의 전도사가 될 것이고, 국제적 법의 지배 확립을 위하여 남은 인생을 바치겠다.”

미리 준비했던 내용이었지만, “마흔여덟 살부터 예순세 살까지”라는 말을 하는 순간, “아, 정말로 긴 시간을 헤이그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들면서, 내 말에 스스로 울컥하는 감정이 솟았다. 이어진 초청 성악가가 부른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My Way)’ 역시 벅찬 감정을 더하게 했다. 지난 15년의 기간이 주마등 같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2001년 3월 14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있었던 선거에 당선되고, 같은 해 11월 17일 재판소에 부임할 때에는 4~5년이면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참으로 긴 시간이 쏜 화살같이 빨리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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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별연에서 만난 밀로셰비치 재판부

 

첫 사건 - 밀로셰비치 재판
나의 첫 사건은 밀로셰비치 1심재판(Prosecutor v. Slobodan Milošević, IT-02-54-T)이었다. 국가 원수에 대한 사상 최초의 국제형사재판으로, 주요 언론에 생방송으로 중계될 정도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는 ‘세기의 재판’이었고, 이에 참여한 것은 큰 영광이었다. 그러나 2002년 2월 12일 시작되었던 재판이 거의 마무리될 무렵인 2006년 3월 11일 피고인이 돌연 사망하는 바람에 사건이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런 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물론 2004년 11월에 있었던 재판관 선거에서 재선되었기 때문에 임기가 2009년 말까지 남아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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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별연에서의 스피치

 

스레브레니차(Srebrenica) 사건
밀로셰비치가 사망했을 무렵 준비절차가 마무리되어 곧 재판이 시작될 수 있는 큰 사건이 둘 있었다. 하나는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계 공화국’의 정치, 군사 지도자들로서 보스니아 무슬림들에 대해 범해진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등의 혐의로 기소된 프를리치 외 5인에 대한 재판(Prosecutor v. Prlić et al., IT-04-74-T)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레브레니차 학살에 책임이 있다고 하는 혐의로 기소된 ‘스릅스카 공화국(Srpska Republic,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계 공화국)’의 군, 경 지휘관들인 포포비치 외 6인에 대한 재판(Prosecutor v. Popović et al., IT-05-88-T)이었다.

당시의 재판소 소장이던 이태리 출신의 포카(Fausto Pocar) 재판관은 나에게 전자의 사건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프랑스 출신의 안토네티(Jean-Claude Antonetti) 재판관이 재판장으로 준비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던 사건인데, 나머지 두 재판관들과 충돌이 있는 등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재판장이 되어 재판부를 이끌어 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안토네티가 강력하게 반발할 것이 명백할 뿐만 아니라, 나는 불어를 못하고 그는 영어를 못해서 서로 간의 소통에도 문제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나의 두 번째 재판은 후자의 스레브레니차 사건이 되었다. 재판소 역사상 피고인 숫자가 가장 많았던 이 사건의 1심재판은 2006년 8월 21일에 시작해서, 2010년 6월 10일 판결 선고로 끝났다. 이렇게 밀로셰비치 사건 4년, 스레브레니차 사건 4년, 합계 8년여의 시간이 흘러가게 되었다.

 

밀로셰비치 재판에서 ICC 당사국 총회 의장까지
‘세기의 재판’에 참여한 것은 큰 영광
48세부터 63세까지 헤이그에서 헌신


카라지치 사건의 재판장이 되다
스레브레니차 사건 재판을 진행하는 동안 그 재판이 끝나면 귀국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사실 재판소에 남아 있는 미제사건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다비치(Dabić)라는 가명으로 심리치료사 행세를 하며 숨어 지내던 전 스릅스카 공화국의 대통령 카라지치(Radovan Karadžić)가 2008년 7월 21일 세르비아 당국에 체포되어 같은 달 30일에 재판소로 이송되어 왔다. 카라지치 사건에 대한 준비절차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보노미(Iain Bonomy) 재판관이 진행했다. 그는 준비절차를 1년여 진행한 후, 2009년 8월 19일 준비절차가 마무리되어 재판을 시작할 수 있다는 취지의 보고서(pre-trial report)를 제출한 다음, 스코틀랜드 최고 법원으로 복귀하기 위하여 2009년 8월 31일자로 재판소에서 사임하고 스코틀랜드로 귀환했다. 그 바람에 카라지치 1심재판을 맡을 재판장 자리가 비게 되었다. 당시 재판소장이었던 자마이카 출신의 로빈슨(Patrick Robinson) 재판관이 그 무렵 나에게 카라지치 사건의 재판장을 맡을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스레브레니차 사건의 변론이 종결된 후 합의를 하면서 판결을 작성하는 중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재판소의 부소장직을 수행하고 있기도 했다. 스레브레니차 사건을 마치고 그냥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카라지치 사건까지 더 마치고 돌아갈 것인지 깊은 고민을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국제재판소에서 카라지치와 같은 이른바 ‘거물(big fish)’에 대한 재판을 재판장으로 진행해 보는 것은 해 볼 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카라지치 재판(Prosecutor v. Radovan Karadžić, IT-95-5/18-T)이 시작됐다. 스레브레니차 사건의 판결 작성과 카라지치 재판이 중복됐던 1년간은 아마 내 일생에서 가장 바빴던 기간들 중의 하나였다. 글머리에 말한 바와 같이 카라지치 사건은 그로부터 6년여의 기간이 지난 후에야 판결을 선고하게 되었고, 그렇게 결국 헤이그에서의 15년이 지나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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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지치 사건 연구관 팀 (일명 K-team)과 함께

 

 

그 밖의 일들
위의 세 사건이 내가 재판소에서 1심 본안재판 사건으로 다룬 것들이지만, 그 밖의 다른 사건도 많이 담당했다. 위의 세 사건 재판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관여한 사건들이다.

큰 본안사건으로는 2008년 8월 17일 판결을 선고한 스트루가에 대한 항소심 사건(Prosecutor v. Pavle Strugar, IT-01-42-A)을 들 수 있다. 두브로브닉(Dubrovnik)에 대한 포격과 관련하여 지휘관 책임이 문제되었던 사건이다. ICTY는 2심제여서 항소심이 최종심이다.

1심에서 유죄를 인정한 피고인들에 대한 형을 정하는 양형 판결(sentencing judgement)에도 다수 관여했다. 그 중에는 카라지치의 뒤를 이어 스릅스카 공화국의 대통령을 역임했던 플라브시치(Biljana Plavšić)에 대한 사건도 있었다.


법원모욕죄 사건들(Contempt of the Tribunal) 역시 많이 담당했다. 재판소의 법규나 명령에 위반해서 비밀 누설, 증언 방해, 증언 거부 등의 행위를 한 사람들에 대한 재판이다.

준비절차 담당 재판관(pre-trial judge)이 되어 준비절차(pre-trial proceedings)를 진행한 사건은 더욱 많다. 포카 재판소장 시절, 그에게 내가 담당하고 있는 준비절차 사건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는 메모를 쓴 적도 있을 정도였다.

특이한 사건으로는 재판소의 ‘종료계획(completion strategy)’에 따라 계류 중인 사건을 현지의 국내 법원에 회부하는 특별재판부(referral bench)의 일원이 되어 회부사건들을 전담하기도 했다.

한편 ICTY에서는 재판관들에게 재판소 소송규칙(Rules of Procedure and Evidence)의 제정, 개정 권한을 주었는데, 각종 규칙 개정안을 검토, 준비해서 재판관 전원합의체(plenary)에 올리는 규칙개정위원회(Rules Committee)의 일원으로 거의 내 재판관 임기 내내 활동하기도 했다.

그 밖에 2008년부터 2011년까지 3년간 재판소의 부소장을 맡으면서 재판소 운영에 관여한 것, 2013년말 재판소장 선거에 도전해 본 것 등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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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호 ICC 재판관(왼쪽)과 최종현 대사(오른쪽)

 

그리고 3년 더 - ICC 당사국 총회 의장
2016년 3월 31일 카라지치 재판을 마치고 아내가 ‘선진 조국’이라고 부르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네덜란드 헤이그와는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국제형사재판과 관련된 업무를 3년간 더 하게 됐다. 2017년 12월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 ICC)의 당사국총회(Assembly of States Parties)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그때부터 2021년 2월까지 3년여간 근무하게 된 것이다. ICTY는 유엔안보리가 설립한 재판소이기 때문에 유엔의 안보리와 총회에 감독기능이 있지만, 다자조약인 로마규정(Rome Statute)에 의하여 설립된 ICC는 로마규정을 비준한 당사국들로 구성된 당사국총회가 재판관 및 소추관 선거, 예산 승인, 법규 및 규칙 제정 등의 제반 감독 기능을 행사한다. 당사국총회 의장 직은 재판관과는 달리 정치적,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어서 또다른 도전이자 색다른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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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가의 마이웨이 연주

 

연재를 시작하면서
이제 15년간 ICTY 재판관, 3년간 ICC 당사국총회 의장으로 경험했던 일들에 관해서 기록해 보려고 한다. 아직도 합의의 비밀을 지켜야 하거나 기타의 이유 때문에, 다 말할 수 없는 내용도 있을 것이다. 또한 법리적인 문제에 관하여 지나치게 전문적인 내용도 여기에서 다루기에는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좀 더 완벽한(?) 회고록은 후일 단행본으로 미루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그간의 나의 경험을 한국의 독자에게 소개한다는 차원에서 쓰려고 한다. 내 스스로도 국제재판소에서 있었던 지난 일들을 정리해 볼 기회를 준 법률신문사에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권오곤 전 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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