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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회고록][전문]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2)

3부 채색(彩色) ⑫ 범죄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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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무시무시한 뇌관 민주조선 편집장 이철규 변사사건

Ⅱ. 대검과 지검에 강력부가 설치된 어두웠던 시절

Ⅲ. ‘범죄와의 전쟁’ 마지막 고비, 조직폭력배 소탕작전

Ⅳ. 비난받던 마약 수출국이 세계공인 마약 청정국으로


대검찰청 형사 제2부장 및 강력부장

(1989. 3. 29. - 1991. 4. 18.)


 

먼저 대검찰청 형사 제2부와 강력부의 연혁을 살펴본다.

  

대검찰청 형사 제2부는 1981년 4월 24일 검찰청 사무기구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신설된 동 규정 제7조의 2에 따라 대검찰청에 설치된 부서로서, 그 밑에 형사 제2과를 두고 있었다. 그 이듬해인 1982년 8월 11일 이 규정이 개정되어 형사 제2과의 주요 분장 사무가 다시 조정되었다.

 

따라서 형사 제2부가 강력부로 확대 개편되기 이전까지는 소속 부서로서 형사 제2과가 있을 뿐, 다른 어떤 하부조직도 없었다. 인원도 20명 미만의 작은 부서였다. 사정이 이러했으므로 허형구 법무부 장관께서 나를 대검 형사 제2부장으로 발령한다면 본인이 섭섭히 여기리라는 뜻을 검찰총장에게 표했을 것이다.

이 대검 형사 제2부는 나의 재임 중인 그해, 즉 1989년 8월 26일 위 규정 제7조의 2가 개정되어 형사 제2부의 명칭을 강력부로 고쳤으며, 기존의 형사 제2과는 강력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후 1989년 2월 13일 신설되어 형사 제1부에 소속되어 있던 마약과가 강력부로 이관됨으로써 조직이 확대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과거 형사 제2과의 소속 업무였던 제7조의 2 제2호에 규정된 업무가 형사 제1부의 형사과로 이관되었다.

지금 시행되고 있는 검찰청 사무기구에 관한 규정을 보니 강력부 신설 시 형사 제1부로부터 형사부로 명칭이 바뀐 그 부서에는 형사 제1과와 형사 제2과가 있으며, 강력부 소속으로는 조직범죄과, 마약과 및 피해자 인권과 등 3개 과가 있다. 과거에 강력과의 업무로 되어 있던 소년 관련 범죄가 위의 형사 제2과로 이관되면서 강력과는 조직범죄와 강력범죄 전담부서로 되고, 그간 강력과에서 다루어 온 범죄 피해자의 지원 보호에 관한 사무를 전담하기 위하여 2008년 2월 29일 피해자 인권과가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

나의 재임 시에도 이미 범죄 피해자의 인권 보호가 절실하였으므로 뒤늦게나마 이런 이름의 부서가 생겼으니 큰 다행이다. 위와 같은 연혁을 보면 내가 대검찰청의 초대 강력부장임을 알게 해 준다. 내가 대검찰청의 형사 제2부장으로 전속된 시기는 제13대 대통령인 노태우 씨가 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에 따라 민선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이다.

내가 근무한 두 직책의 이름이 서로 다르기는 하나 본질적인 업무는 같은 것이었으므로 그 근무 기간 중 내가 겪은 몇 가지 일을 기록으로 남겨 후인들의 참고에 공하려 한다. 이 일은 검찰만의 단순한 업무 영역에 그치는 것이 아닌 역사적인 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후인들이 참고하여야 할 여러 가지 시사점을 주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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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광주지검 건물 
<사진=대검찰청 박현철 대변인 제공>


첫 번째의 사건은 ‘조선대생 이철규 변사사건’이다. 내가 대검의 형사 제2부장으로 부임한 지 한 달 남짓한 때에 일어난 사건이다.

1989년 5월 10 광주지방검찰청의 변사체 발견 보고가 있었다. 전남 광주시에 있는 조선대학교의 교지인 『민주조선』의 편집위원장인 이철규라는 사람이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요지의 보고였다. 당시는 검찰, 경찰, 안기부 등으로 공안합동수사본부가 구성되어 학생과 근로자들의 불법시위에 대한 수사가 한창이던 때였다. 이철규는 위 『민주조선』의 발간과 관련하여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당국에 지명수배된 자였다.

위 조선대학교 사정을 보면, 이 대학 구내에는 반정부적 내용의 각종 현수막과 대자보가 걸려 있었으며, 그 내용은 북한의 선전·선동 내용을 그대로 전파한 듯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검찰, 경찰 등 수사기관이나 어떤 정보기관도 이 대학 구내에는 출입할 수 없었음은 물론, 만약 진압 작전이 벌어진다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어서 국가공권력이 이런 불법행위에 대하여 어떤 마땅한 조치도 마련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마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남한 해방구 같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고약한 학교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하여 법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적절한 평가도 이루어지지 못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 낸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변사체가 이 조선대학교 학생인 데다가 그 교지인 민주조선의 편집장이란 직책을 가진 자로서 당국에 지명수배된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사인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사건이 일으킬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의 신분과 수배된 사건의 내용만을 고려한다면, 대검찰청의 공안부에서 이 사건 수사 내용을 보고받고 지휘할 수도 있는 것이었으나 공안부의 지휘로 이 변사사건의 전모를 낱낱이 규명하더라도 대외적으로는 물론 광주 지역의 시민 정서상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이에 따라 이철규 변사사건의 수사 지휘는 대검 형사 제2부에서 맡기로 방침이 확정되었다. 이 결론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이 사건 발생 당시, 광주지방검찰청의 검사장은 유순석(柳淳錫), 차장검사는 심상명(沈相明), 사건 전담 형사 제1부장은 김각영(金珏泳)이었다. 김각영 부장검사는 내가 서울지검 특수 제1부장이었던 시절, 그 부 소속의 수석검사였으므로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처지였다.

정치적 또는 대외적인 문제에 관한 대검의 지시는 검사장에게 전달되었으나 이 사건 수사의 세부적인 모든 내용은 내가 김각영 부장검사에게 직접 지시하였다. 지휘체계에 따라 대검의 지시 내용이 전달되는 과정에 착오가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내가 직접 사건 보고를 받고 그 내용에 따른 적절한 지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변사체가 발견된 20일 후인 1989년 5월 30일 광주지방검찰청에서 이철규 변사사건에 관한 종합 수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그 발표 내용을 요약한 공중파 방송의 보도는 다음과 같다. 이 보도 내용이 위 수사 결과를 가장 간명하고 정확하게 표현하였으므로 이를 여기에 인용한다.

“조선대생 이철규 군 변사사건을 수사해 온 광주지방검찰청은 오늘 아침 최종 수사 결과 이 군이 3일 밤 10시 56분쯤 광주시 청옥동 청암교 밑 석축에서 실족 추락에 의해 익사한 것으로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하기로 했으며 타살 가능성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검찰은 오늘 오전 9시 기자회견을 갖고 수사 결과를 발표, 조선대 교지 민주조선 창간호와 관련돼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수배 중이던 이 군이 지난 3일 밤 10시 12분쯤 광주시 청옥동 제4수원지 다리에서 경찰의 검문을 받자 산속으로 도주해 경찰관의 추적을 피해 철조망을 지나 수원지로 들어간 뒤 사파리 점퍼를 벗어 두고 만일의 체포에 대비해서 운동권 학생들의 인적 사항이 적힌 메모지를 찢어 버렸으며, 철조망 안쪽 언덕과 습지를 따라 청암교 밑을 지나 상류 쪽으로 달아나던 중 다리 밑 석축에 이르러 음력 그믐밤의 어두운 상황에 진흙이 묻은 구두를 신고 급히 통과하려다 밤 10시 56분쯤 실족해 빠져 익사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검찰은 또 공개 사체 부검 후, 폐 등 12점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공개 감정하고 유류품 62점을 수거 감정하는 한편, 8차례에 걸친 현장 실황 조사 결과 살해 후 유기 가능성 등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서 이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말하고 사체의 재부검은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나 지금도 살아 꿈틀대는 듯한 1989년도 나의 검찰 업무 일지의 내용에 따라 그 과정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1989년 5월 10일 발견된 변사체가 수배 중인 조선대학교 민주조선의 편집위원장으로 추정된다는 보고에 따라 즉시 광주지검에 수사전담반이 편성되어 일말의 의혹도 남기지 않도록 관계자의 입회하에 철저한 부검이 진행되었으며,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을 위한 검찰의 강력한 수사 의지가 천명되었음은 당연하다.

광주지검에서 대검에 보고되는 모든 내용은 청와대의 민정, 정무, 행정 등의 각 라인을 통해 신속히 전파되었으며 당시의 집권당인 민정당에도 그 내용을 알려야 했다. 이 변사사건이 타살 혐의가 있는 사건으로 규명될 경우를 대비한 사전 조치였다. 이 사건의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정치적인 공세가 이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검찰이 예상한 대로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이런 사태는 이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특위의 활동이 마무리되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 사건이 발생된 직후 해외 언론의 관심도 점점 고조되었으며 청와대에서는 언론인 출신의 정치인인 K 박사를 단장으로 하는 TF까지 구성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사건에 대한 제6공화국 정권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와의 연석회의 시 그들이 내게 요청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칠흑 같은 그믐날 한밤중에 일어난 일이라 하더라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에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다보면서 이철규가 검문을 피해 달아나 실족 지점에서 추락하여 익사한 전 과정을 영화 보듯 생생히 재연하는 것같이 수사하여 그 내용대로 수사 결과를 발표해 달라.”

 

그들이 내게 주문한 내용이 이러하였으니 이 사건 수사 지휘의 총책임자인 내가 어떤 자세로 이 사건을 처리해야 했겠는가? 광주지검의 수사 결과 발표문은 여러 차례의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면서 제기된 또는 제기될 수 있는 여러 문제점에 일일이 대비하여 적절한 해명이 될 수 있도록 작성되어 언론에 공표되었다.

이 수사 결과 발표 후 불순분자들이 동시다발의 집단행동으로 검사들과 검찰청사를 기습할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있어서 이에 철저히 대비하도록 지시해야 할 정도로 이 사건의 수사 결과 발표는 중대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 사건의 수사 내용이야말로 눈이 세 개 달린 귀신이 본 헛된 내용이 어떨지 알 수 없으나, 눈이 두 개 달린 귀신이라면 이 사건의 수사 결과에 대하여는 절대로 뒷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완벽히 이루어진 수사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광주지검의 수사 결과 발표 이틀 뒤인 1989년 6월 1일 검찰에서 이미 예상한 대로 국회 국정조사특위 위원 전원이 광주지검에 도착하여 국정조사 활동이 개시되었다. 이들의 국정조사 개시 후 광주지검에서 수사한 모든 내용의 기록을 당장 제출하라는 요구가 있었다.

원래 수사 기록을 대외적으로 공표할 수 없음은 형사소송법의 법리상 당연하므로 광주지검이 그 요구에 순순히 응하여 모든 수사 기록을 국회의원의 책상으로 옮겨 놓을 수는 없다. 검사장이 그 요구에 응하지 않았음은 불문가지이다. 이로써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게 된다. 야당인 평민당 의원들이 이 국정조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선언한 후, 예약한 상경 기차표의 예약을 취소하고 그 상경 시간을 앞당겨 기차표 예매 절차를 밟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 당시 대검에 있지 않았고, 그 전날인 5월 31일부터 시작된 인천지방검찰청에 대한 대검의 사무감사 책임자로 인천지방검찰청에 있었다. 대검 수뇌부로부터 황급히 걸려온 전화를 받고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즉시 상경하여 검찰 수뇌를 모시고 대책을 협의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만약 국회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국정조사가 검찰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면, 이 정치적인 책임을 어떻게 검찰이 질 수 있겠는가? 타협점을 찾아 해결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보안법위반 혐의’ 지명 수배된 이철규
광주 청옥동 수원지서 변사체로 발견
진상조사는 공안부 아닌 대검 형사2부
사체 부검서도 유기·살해 가능성 못 찾아
검문 피해 도주하다 ‘실족 추락 익사’ 결론

수사 결과 발표 이틀 뒤 국회조사단 도착
대외 공표할 수 없는 수사기록도 제출 요구
‘열람하되 비공개’ 제안으로 국정조사 재개
위원장 “조속 장례 희망” 발표로 조사 매듭
검찰, 의연한 자세로 사건처리에 자부심

 

광주지방검찰청 검사장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대검 지시가 내려갔다.

 

1) 기록을 열람하되 비공개로 하며, 광주지방검찰청과 숙소 이외의 장소에서는 이를 열람할 수 없다.

2) 긴요하다고 인정되는 수사 기록을 복사하여 제출하되, 그 부분을 특정하여 2부를 복사하고, 각 당에 1부씩 제공한다.

3) 복사되는 기록 중 수사 기록에 나타난 사람의 인적 사항이 외부에 누설됨으로써 그 사람이 입게 되는 피해의 예방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이를 제외하거나 그 인적 사항을 가리고 복사한다.
4) 열람 후에는 즉시 이를 회수한다.
5) 열람한 사실이 사후 외부에 누설되지 않도록 국회의원들에게 철저히 당부한다.

우선 이런 정도로 돌파구를 찾아 국회의원을 국정조사 현장으로 다시 모셔 오라는 지시가 광주지검에 전달되었다. 검찰의 이런 양보로 국회의 국정조사는 다시 시작되어 그날 저녁 늦게 국정조사를 마친 국회의원들은 상경하였다. 이로써 검찰은 불필요한 국민의 의혹을 증폭시키는 일이 없게 되었고, 광주 지역의 격앙된 분위기에 편승한 불측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으며, 불필요한 정치적 비난을 받지 않게 되었다.

예외 없는 원칙이 어디에 있을 수 있는가? 원칙만을 고집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은 이 사례가 보여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 사건 수사에 관한 한 앙천부지 일편불괴(仰天俯地 一片不愧)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으므로, 검찰이 떳떳하지 못하게 수사한 것이 없음이 자명한데 사건의 전모를 굳이 스스로 가리려 한다는 어떤 사소한 비난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수사 결과가 발표된 직후부터 야당 측은 변사체에 대한 재부검을 강력히 요구하는 내용의 정치적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국정조사특위에서 50여 명에 대한 증인 신문을 진행하면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해 정치적 공세를 벌이기 시작하자, 민정당의 요구로 당정 협의가 진행되면서부터 민정당조차 이런 여론을 외면할 수 없었던지 변사체에 대한 재부검 문제를 제기했다. 국정조사특위로서는 정치적 해법을 찾아야 했으므로 검사장의 증인선서와 함께 변사체에 대한 재부검 문제에 관한 표결 가능성도 있었다.

광주 검사장이 국정조사특위에 다시 출석하여 추가 수사 결과를 보고하였으며, 그간에 제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한 상세한 보고가 있었다. 그러나 1989년 6월 17일 국회 국정조사특위가 변사체의 재부검을 요청하는 내용의 공문이 검찰에 접수되었다. 그 3일 후인 6월 20일 국회 국정조사단이 다시 광주지검에 도착하여 국정조사 활동을 한 후 동일 21시 45분 그 조사 활동을 종료하였는데, 그 날짜 국회 속기록에는 위원장의 다음과 같은 발언 내용이 들어 있었다.

 

“검찰에서는 오늘 여러 위원님께서 질문을 통해 지적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참고하시고 추가 부검의 필요성, 배경 등을 또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실시 방법은 검사장 책임하에 실시하되 6월 27일이 국정조사 만료 기간이므로 추가 부검 조치 결과를 6월 27일 전까지 통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위 조사 기간이 만료되는 6월 27일 전날인 6월 26일, 검찰의 공문이 국회로 발송되었다. 그 공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국정조사특위가 공문을 통해 지적한 사항에 대한 광주지검의 조치 내용, 추가 부검의 필요성 유무에 대한 검토 결과와 추가 부검의 문제점, 추가 부검이 불필요하므로 이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결론.

국정조사의 만기일인 6월 27일, 국정조사특위 위원장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변사자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하며 조속한 장례를 희망한다. 이 사건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 내용에 대한 국민의 제보를 요망한다. 검찰의 추가 부검 거부와 자료 제출에 관련한 사태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

 

위와 같은 경위로 국회의 국정조사는 마무리되었다.

그다음 날인 6월 28일 나는 광주지방검찰청을 공식적으로 방문하여 이 사건 처리에 진력한 광주지방검찰청 검사장 이하 전 직원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검찰총장의 뜻을 가감 없이 전해 주었으며, 검찰총장께서 내려 주신 격려금을 전달하고 이 사건 수사에 참여하였던 전 직원을 위로한 후 상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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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부당한 정치적 공세에 굴하지 않고 의연한 자세로 본분을 지켜 떳떳하게 사건을 처리하였던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 27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광주지방검찰청 유순석 검사장, 심상명 차장검사, 김각영 형사 제1부장 및 정충수(鄭忠秀) 공안부장과 소속 검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다.

 



다음은 나의 대검 형사 제2부장 및 강력부장 재임 중인 2년여에 걸친 범죄와의 전쟁 이야기를 하려 한다.

1980년대 말의 시대 상황을 보면 88 서울 하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고는 하나 시민들의 의식은 이에 걸맞게 변화되지 못한 때였다. 위의 이철규 변사사건의 경우에서 본 바와 같이 호남 지방에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을 이유로 반정부적 감정이 누그러지지 못한 채 신군부에 저항하는 각종 반정부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고, 경상도 지방에서도 부산·마산·창원 지역을 중심으로 불법집회와 시위가 이어지면서 점차 과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치안 상태도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강·절도 사범을 비롯한 단발적인 사건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행인에게 퍽치기라는 수법까지 동원한 강도 사건과 함께 부녀자와 무고한 시민을 집단적으로 납치하는 사례도 빈발하고 있어서 시민들이 마음 놓고 밤거리를 다닐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민생치안에 대한 국민의 원성이 고조되고 있던 시대였다.

대도시의 뒷골목에는 무허가 음식점이 난립하여 교통 혼잡을 야기할 정도였으며 각종 향락 퇴폐업소가 난립하여 이에 기생하는 각종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으니 이 역시 큰 골칫거리가 되기에 이르렀다.

  

조직폭력배가 이런 업소를 장악하여 자금원으로 활용하면서 점차 흉포화·조직화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한마디로 법이 있어도 지켜지지 않는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된 결과는 경찰력이 체제 유지를 위한 공안 수요에 대부분 충당됨으로써 시민의 기초 질서를 확립하고 범죄를 예방하여야 할 경찰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법이 있어도 지켜지지 않는 사회의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였다. 그때까지도 우리나라는 마약 수입국이 아니라 마약 수출국이란 오명을 쓰고 국제사회의 빈축을 사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런 가운데 나는 민생치안을 확립하여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대검 형사 제2부장으로 부임하였으며, 이런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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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찰청 강력부장 시절 민생치안 관계기관 회의. 오른쪽부터 노태우 당시 대통령, 허형구 법무부 장관, 김기춘 검찰총장, 김두희 법무부 차관, 최상엽 대검찰청 차장검사
<제공=송종의 장관>

 

이 ‘범죄와의 전쟁’이란 말은 나의 대검 강력부장 시절인 1990년 10월 13일 제 6공화국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담화에 처음 등장하는 용어이다.

 

당시 정부의 민생치안 확립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국가정책과제가 되기에 이르러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면서 국가의 당면 중요 시책으로 내세운 것이 이 범죄와의 전쟁이란 것이다. 그 이후 이 용어는 수정된 바 없이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며, 나의 검찰 재임 기간 중 이 거대한 적인 범죄와는 정전협정이나 휴전협정은 물론 없었고, 전쟁의 종식 선언 또한 없었다.

이 담화가 발표되기 전인 1989년 3월에 내가 대검찰청 형사 제2부장으로 발령받아 대검에 부임하여 보니 시커먼 먹구름이 곳곳에서 몰려오기 시작하여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김기춘 검찰총장이 취임한 지 이미 4개월에 이른 때였으므로 그의 구상에 따라 대검찰청에 2개의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대검찰청 공안부장을 책임자로 하는 공안사범 합동수사본부와 대검찰청 형사 제2부장을 책임자로 하는 소위 민생침해사범 합동수사본부가 그것이다.

 

검찰총장은 위 두 기구를 통해 일선 검찰청을 지휘하여 체제에 도전하는 공안사범에 대응하고, 국민 생활의 안정을 해치는 범죄를 척결하여 민생치안을 확립하고자 하는 큰 뜻이 있었던 것이다.

 

나의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재임 기간 중에도 이미 이 민생치안의 확립이 시급한 정책과제로 선정되어 국정 운영의 중점이 되었으므로 그런 사정은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위의 공안 합수부는 이철규 변사사건이 종료된 이후 해체되었으나 민생합수부는 한층 더 조직을 강화하여 전국으로 전선을 확대하면서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제대로 된 전쟁을 치르려면 그 의지도 중요하겠으나 이런 전쟁을 수행할 조직도 정비해야 한다. 용어는 민생침해사범 합동수사본부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는 기구였으나 전 방위적인 전쟁을 벌이며 작전을 수행해야 할 사령부인 대검찰청에는 형사 제2과라는 오직 한 개의 부서만 설치되어 있는 실로 초라한 기구에 불과했다.

합동수사라는 명칭에 붙어 있기는 하였으나 일선에서 일을 수행하여야 할 기관은 오직 검찰과 경찰뿐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이 검·경만의 힘으로만 해결될 일이 아니었으므로 범정부적인 지원과 협조를 구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실제로 그 일을 추진해야 할 무슨 협의체라도 있어야 비로소 합동수사본부 구실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취지에 따라 중앙에 전국 수사지도협의회가 구성되었다. 대검 형사 제2부장 주관으로 내무부 지방행정국장, 치안본부 제3차장, 동 형사부장, 문교부 생활지도장학관, 건설부 도시국장, 보사부 위생국장, 노동부 직업안전국장,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의 국장급 심의관을 구성원으로 하는 위원회 비슷한 협의체였다.

이 수사지도협의회는 무슨 모양을 갖추기 위해 만든 형식적인 협의체가 아니었다. 전국적인 규모의 일제 단속 등 당면한 현안이 있을 때마다 사전 그 문제점을 토의하면서 일선 검경의 단속에 관한 정부 차원의 원만한 협조를 이끌어 내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어떤 법령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행정 협조 차원에서 만든 기구였으나 이 협의회의 실질적인 운영으로 각 부처의 동참과 협조를 이끌어 내면서 민생치안의 확립을 위한 각별한 노력이 이어져 왔던 것이다.

우선 전국 검찰에 대검의 이러한 수사 의지를 전파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내가 제2부장으로 부임한 20일 후인 1989년 4월 20일 대검에서 전국 지역단위 합동수사부가 설치된 15개 지방검찰청의 민생침해사범 수사 책임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검찰총장 주재로 회의가 개최되어 검찰의 강력 수사 의지가 천명되었으며 이 내용이 각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 회의가 끝난 직후 그날 오후에 나는 불법시위에 대처하다가 화염병 공격으로 중상을 입은 전투경찰대원을 위문하기 위해 그들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고 검찰총장의 위로금을 전달한 바 있다.

 

그 며칠 전에는 K 대학교 학생들이 총장 댁에 월담 침입하여 스승인 총장을 협박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조직폭력배들이 부녀자를 납치해 유흥가에 팔아넘기거나 행인들을 강제로 납치해 낙도에 감금하면서 노역시키는 사례도 적발되어 국내외에 커다란 충격을 주기도 했다.

나라의 치안 상황이 이런 형편이었으므로 회의가 개최되기 이틀 전인 4월 18일에 뉴스위크의 편집 책임자가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책임 있는 정부 당국자와의 공식적인 인터뷰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책임 있는 정부 당국자’로 그를 면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는 뉴스위크(Newsweek)지의 기고자(contributor)로서 ‘special respondent’라는 직함을 가진 David Bank라는 사람이었다.

그가 나에게 시종 날카롭게 물어보는 내용은 내가 이미 예상한 대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정부 당국자가 현재까지 파악하고 있는 위와 같은 인신매매 사범의 실태, 소위 인신매매 사범과 조직범죄 집단과의 전쟁 내용, 이들 집단과 미국의 매춘조직의 연계 유무, 미국의 마약범죄와 한국 마약사범의 연계 유무, 국민 생활의 안정을 침해하는 소위 민생침해 사범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단속 내용과 재발 방지 대책 등이 그의 관심 내용이었다. 우리 대한민국이 처한 이런 딱한 현실이 외신 기자의 관심을 끈 지 이미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수시로 상부에 보고해야 할 내용과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체계적인 장기 대책과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수립·시행하는 내용의 청사진을 마련해야 할 형편이었으나 일을 할 만한 사람은 검사 신분을 가진 나와 형사 제2과장 두 사람뿐이었다.

 

수시로 총장에게 보고하여 검찰연구관실 소속 연구관의 힘을 빌려 응급조치를 취해 오다가 대구지방검찰청 소속 김태현 검사를 검찰연구관 직무대리로 발령하고, 다른 한 사람의 검사를 잠정적으로 차출하여 임시 기획단을 만들어 시급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위 이철규 변사사건이 종결될 즈음인 6월 26일,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전국 검사장 회의가 대검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가 소집된 목적은 오직 민생치안의 확립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민생활침해사범 합동수사본부의 설치와 각 지검 수사부의 활동 방향이 제시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조직폭력배 전담수사반의 편성과 운영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가 각 지방검찰청에 하달되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대검의 직제 개편이 4월 8일부터 추진되고 있었다. 대검 형사 제1부 소속이었던 마약과를 형사 제2부로 옮기고, 형사 제2부의 명칭을 다른 이름으로 변경하는 내용의 직제개정안이었다.

 

이 일은 법무부에 보고된 후 경제기획원과 총무처 등 관계기관과 협의를 진행하면서 추진되었다. 그해 8월 26일자로 대통령령인 검찰청 사무기구에 관한 규정이 개정됨으로써 대검 형사 제1부에 설치되어 있던 마약과가 강력부의 소속으로 변경되었다. 마약범죄는 그 사범의 성질상 조직범죄가 대부분이고, 강력사범과는 동전의 앞뒤와 같은 관계인 범죄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직제 개편이 추진된 것이다.

 

대검의 조직을 이렇게 개편한 또 다른 중요한 한 가지가 이유가 있다.

 

위 검찰청 사무기구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대검 형사 제1부와 형사 제2부는 발생된 범죄의 성격에 따라 그 사물관할을 달리하고 있어서 민생치안 확립을 위해 단속을 실시하더라도 그 범죄의 내용을 구분하여 어떤 것은 형사 제1부에서, 강력범죄를 중심으로 한 조직범죄나 흉악범죄는 형사 제2부에서 보고받고 일선 검찰을 지휘하게 되어 있던 탓에 지휘체계의 혼란이 야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선 수사기관의 처지도 이와 같아서 청에 따라 지역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하는 경우에도 어떤 청은 형사부장, 어떤 청은 특별수사부장이 책임자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이것은 응급조치에 불과할 뿐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단속의 효율성 또한 크게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서 일선 검찰청 특별수사를 지휘하는 것처럼 대검의 특별 지시 및 그에 따른 적절한 지도와 감독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체제였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일선 검찰청에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범죄 단속을 전담할 부서의 설치가 반드시 필요했다.

기구의 신설과 인원의 확충이라는 것이 검찰만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인원의 확충은 총무처의 소관 사항이고, 이에 따른 예산의 뒷받침은 기획재정부의 전담 소관 사항이다. 중앙행정기관인 이 두 부처가 그 필요성에 따라 검찰의 요청을 들어주어야 비로소 현실적으로 가능하며, 사전에 청와대 등 정책 담당 부서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이 일만은 반드시 추진해야 할 사정이었으므로 검찰청의 기구를 확대하기 위하여 전 방위적인 노력을 기울이면서 대도시 지방검찰청에 강력부라는 전담부서를 신설하는 어려운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일은 대검 형사 제2부의 명칭을 강력부로 바꾸면서부터 함께 추진되었으나 우선 급한 대로 대검찰청 사무기구만을 개편했다.

형사 제2부가 강력부로 개편된 직후 우선 서울, 부산, 광주 등 세 곳만이라도 지역 지방검찰청에 강력부를 설치하는 내용으로 일을 추진하라는 검찰총장의 특별 지시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전국 지방검찰청 본청에 모두 강력부를 설치하고 싶었으나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하지 않겠는가?

궁리 끝에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이왕 조직의 화대 개편을 추진하는 김에서울, 인천, 수원, 대구, 부산, 광주지방검찰청 등 6개 검찰청에 강력부 설치를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대검 강력부가 생긴 직후부터 추진되기 시작한 이 일은 그 이듬해인 1990년 4월에 가서 매듭을 짓게 되는데, 4월 12일 드디어 총무처와의 협의가 끝났다. 첫 번째 관문을 넘은 것이다. 서울법대 동기 동창생인 총무처 행정조직국장이 나를 절친한 친구로 두었던 죗값을 치르느라고 많이 시달렸을 것이다.

위의 대도시에 있는 여섯 개 지방검찰청에 강력부를 신설하고, 강력부 산하에 6개의 강력과를 두며, 인원은 80명 수준으로 조정하는 내용이었다. 검찰이 요청했던 검찰서기관 6명은 그 요청대로 반영되었으나 사무요원으로 요청한 검찰사무관과 하위직 검찰공무원 156명 인원은 80명 수준으로 하는 내용의 직제 개편안이 총무처에서 확정되었던 것이다.

 

6대 지방검찰청에 강력과를 설치하여 서기관 6명, 사무관 9명, 주사 13명, 주사보 17명, 서기 14명, 서기보 10명, 기능직 12명, 합계 81명을 증원하는 내용의 개정령이었다. 그 직후 기획재정부와 예산 협의가 끝나 4월 24일 검찰청 사무기구에 관한 규정 개정령이 차관회의를 통과하였다.


80년대 말 도시마다 퇴폐업소 등 난립
조직폭력배도 활개…곳곳이 무법지대
대검에는 ‘형사2과’ 한 개 부서만 존재
‘지검에 전담부서 신설’ 난관 속 작업착수
서울 등 6개 검찰청에 강력부 신설 매듭

서울지검 초대 강력부장에 관심 집중 속
‘특별수사 1부장’ 심재륜 검사 강력 천거
더불어 현재 직책도 겸할 수 있도록 요청
유례없는 ‘강력부장 겸 특수1부장’ 탄생
대검서 추천 6명 모두 지검 강력부장으로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 했다.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나의 대학 동기생이 선행을 베풀었으니 하늘이 어찌 무심할 수 있겠는가? 그는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내각에서 나와 함께 각료로 등용되어 그때나 지금이나 이놈 저놈 하며 지내고 있다. 나의 법제처장 재직 중 내각의 개편으로 새로 총무처 장관에 임명된 심우영(沈宇永)이 그 사람이다.

서울, 부산, 광주 등 3개의 지방검찰청만이라도 강력부와 강력과를 설치해 보자는 것이 검찰 수뇌부의 생각이었었으나 나는 최소한 여섯 개의 지방검찰청에는 강력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므로 이를 목표로 일을 추진하였던 것인데, 당시 민생치안의 확립이라는 국가 정책과제가 매우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관계 부처에서 모두 그 필요성에 공감함으로써 원만히 일이 처리되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직제의 개정이 당시로서는 가히 획기적인 일이었으나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는 속담이 시사하듯 그때 전국의 각 지방검찰청 본청에 강력부와 강력과가 설치되지 못한 아쉬움이 없지 않다.


이런 직제개정이 이루어진 이후 수십 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도 나머지 검찰청 본청에 강력부와 강력과가 신설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니 나의 아쉬움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1990년 5월 7일자로 법령이 개정되어 시행됨으로써 필연적으로 고등검찰관의 인사이동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신설된 강력부가 어떤 위상을 가진 부서인가는 그 시대 상황과 부서의 직무 내용에 따라 결정될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자리에 가는 사람이 어떤 평가를 받는 사람인가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서울지방검찰청의 초대 강력부장이 누구로 임명되느냐 하는 것은 전 검사들의 관심 사항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인사 발령 직전에 내가 검찰총장에게 진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 지검의 초대 강력부장 6명의 인선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고, 특히 서울지방검찰청의 강력부장은 갈 만한 사람이 그 자리에 갔다는 평가가 있어야 하므로 이 부분만은 나의 청을 가납해 주시기 바란다는 취지로 운을 뗐다.

내가 서울지검의 초대 강력부장으로 천거한 사람은 당시 특별수사 제1부장이던 심재륜(沈在淪) 검사였다. 그는 당시 서울지방검찰청의 민생합수부장으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특수수사통 검사였기 때문이다.

 

본인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으나 앞으로 강력부가 그 위상을 지키고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부서임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기 위해서였다. 오래전에 나를 서울지방검찰청 특별수사 제1부장으로부터 전주지방검찰청의 차장검사로 전보시킨 김석희 전 법무부 장관의 인사 방침과 같은 맥락이었던 것이다.

 

본청 특별수사 제1부장의 자존심이 어떤 것인지는 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으므로 심 부장검사가 혹시 섭섭해할지 몰라 한 가지 조건을 검찰총장에게 더 요청했다. 본직 발령을 특수 제1부장이 아닌 강력부장으로 인사를 단행하되, 그가 현재까지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 특별수사 제1부장직을 겸할 수 있도록 동시에 겸직 발령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검찰총장의 내락을 받은 후 내가 직접 심재륜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특별수사 제1부장직을 이미 오래전에 역임한 대선배였으므로 그가 이런 나의 인사 방침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당시 6대 지검에서 민생합수부장의 직을 수행하고 있었거나, 대검 강력부에서 천거한 6명의 부장검사가 각 지검의 초대 강력부장으로 임명되었다.

 

단, 심재륜 부장검사에게는 다음과 같은 지시가 내려갔다. 새로 서울지방검찰청에 강력부장실이 마련된다면 사무실은 본직 발령인 강력부장실로 옮겨 사무를 처리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그는 우리나라 검찰사상 유례가 없는 서울지방검찰청의 강력부장 겸 특별수사 제1부장이 되었다.

각 지검의 민생합수부에서 조직폭력배의 단속이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할 무렵, 나는 검찰총장에게 특별히 다음과 같이 진언한 적이 있었다.

 

이 조직폭력배들에 대한 강력한 단속이 시작되면 그 담당 검사들을 모함하는 내용이 반드시 법무 검찰 수뇌부에 들려올 것이다. 이들이 검사들의 비위 사실을 들먹거리면서 좌천을 요구하는 사태가 예상되고, 그래도 수뇌부가 이에 초연한다면 그 이후에는 이들에 대한 영전 청탁이 뒤따를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해서라도 검사들을 그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책략이다. 이런 일은 불을 보듯 뻔하게 예상되므로 법무 검찰 수뇌부는 절대로 어떤 모함이나 청탁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건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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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조직폭력배들은 이미 상당한 자금을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범죄의 현장에 출몰하는 일이 거의 없이 조직을 장악하여 범죄 행각을 벌이고 있었으며, 이 자금줄을 바탕으로 정치권 인사의 후원자로서 암묵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던 많은 정황을 검찰은 알고 있었다. 김기춘 검찰총장은 그 직을 수행하는 동안 나의 이런 간곡한 진언이 왜 필요하였던 것인지 실감했을 것이다. 다만, 범죄와의 전쟁 총사령관이었던 나에 대하여 어떤 비방과 모함이 법무부 장관이나 검찰총장에게 있었는지 내가 직접 들은 바 없으므로 나는 그 내용을 알지 못한다.

이 조직폭력배들의 소탕 기간 중 그 총책임자인 나도 이런 사정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때로는 눈과 귀를 막아 가며 직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검사들에 대한 모함과 비방에도 불구하고 검찰 지휘부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의연한 자세로 부하 검사들을 믿고 격려하면서 그들의 철저한 보호자가 된 것은 자랑스러운 우리 검찰의 생생한 역사이다.

조직의 개편과 함께 범죄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예산이 어떻게 뒷받침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싸움하는 장수와 병사들이 제대로 싸움하기 위해서는 군량이 보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대검 형사 제2부장으로 부임하여 살펴보니 일선 검찰에서 쓸 예산이 별로 없었다. 대검 역시 같은 처지였다. 부임 20일이 지날 무렵부터 이 민생치안 예산을 예비비로 책정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어려운 일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검찰총장의 지시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즉시 법무부 검찰국과의 협의를 진행하면서 일을 추진해 나갔다. 3개월이 지난 그해 7월 초에 검찰의 내년도 본예산으로 민생치안 질서 유지 항목이 신설되었으나 이 돈은 내년에나 쓸 수 있는 돈이었다.

그해 11월 초에 다시 민생치안 예비비가 책정되었다. 이런 예산이 뒷받침되면서 나는 재임 기간 중 민생합수부가 설치된 16개 지방검찰청에 대한 수사비를 수시로 지원해 주었으며, 이 기관을 모두 순회하는 격려 방문 일정을 잡아 일선 검찰청의 수사 상황을 점검하면서 애로 사항을 청취하고, 민생합수부장에게 검찰총장의 격려금을 직접 전달했다.

이 돈은 기관장인 검사장이 절대로 손을 댈 수 없도록 합수부장에게 직접 전달해 주었다. 검사장은 기관장이어서 기관 운영을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한 자리였으므로 이런 나의 방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검사장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뜻을 그들이 모를 리 없었으므로 이런 방식으로 현장 수사 요원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었다.
이렇게 일하다 보니 민생합수부가 설치되지 않았던 검찰청에서 스스로 민생침해사범 합동수사부를 만들어 놓고 대검에 보고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 아닌가? 그 조치에 대해 격려하는 뜻의 수사정보비가 그들에게 주어졌음은 물론이다.

내가 16개 검찰청을 일일이 찾아 나서서 격려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민생합수부의 책임자는 모두 부장검사였는데, 마치 일선 경찰서의 형사계장이나 해야 할 일을 그들이 직접 나서서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그 딱한 처지를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사 스스로 파견 경찰관을 지휘하여 범죄 현장에 나서야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일제 단속 시에는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한밤중에 수사 총책임자로서 그 현장에 임하여 부하 직원을 독려하면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당시 실정이었다. 이런 단속이 이루어지면서 불법과 무질서가 난무하였던 각종 노점상, 유흥업소와 향락·퇴폐업소가 점차 사라져 조직폭력배가 기생할 만한 토양이 정화되어 점진적으로 생활의 기초 질서가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대검찰청 형사 제2부장으로 부임한 이후 민생침해 사범의 유발 환경을 정화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즉, 이런 환경에 기생하는 조직폭력배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그 실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내가 부임한 그해 11월까지 몇 번의 대대적인 단속으로 2,393명을 입건하여 360명을 구속했고, 그해 11월 23일자로 실시된 범정부적인 대대적 단속으로 3,280을 검거하여 520명을 구속대상자로 선정한 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범죄가 단속 대상으로 적발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범죄를 유발하는 환경은 이런 방법으로 점차 정화되기 시작했으나 이미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던 조직폭력 범죄는 쉽사리 뿌리 뽑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범죄와의 전쟁이란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조직폭력배의 소탕에 관한 내용을 적는다.

 

우리나라의 정부 수립 이후 간헐적으로 조직폭력배에 대한 단속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두 번에 걸친 혁명적인 조치가 있었다. 첫 번째는 1960년에 선포된 깡패소탕령이었고, 두 번째는 1980년에 있었던 소위 삼청교육이었다. 이것은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근본이념인 법치주의의 취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법의 혁명적인 조치였다.


이런 문제점을 위정자가 몰랐을 턱이 없으나 당시의 시대 상황에 비추어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 시민사회를 지향하는 국민의 인권의식이 점차 높아짐으로써 세상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으므로 이런 혁명적 조치가 용인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언급하는 조직폭력배의 소탕은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인 법치주의 이념을 훼손하지 않는 적법 절차에 따른 수사와 법원의 판결에 따라 이루어진 범죄의 단속과 처벌이다.

이 조직폭력배의 단속에 있어서 그간 검경이 손을 놓고 지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발생된 범죄의 진압과 처벌에 그쳤을 뿐, 그 범죄에 폭력조직이 관여했는지, 또 그 실정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체계적인 분석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이 저지른 가시적인 범죄만을 가려내 처벌하는 데 그쳤다는 지적이 타당할 것이다.

위 이철규 변사사건이 법률적으로 종결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날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1989년 6월 26일이었다. 그날은 국회 국정조사특위의 활동이 종료되는 날이었으며, 그날 중에 검찰에서 발송된 공문이 국회에 접수되도록 예정된 날이었다.

 

그날 오전에 대검찰청에서 전국 검사장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오직 민생치안의 확립이라는 한 가지 주제만을 토론하기 위해서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비로소 조직폭력배의 단속과 처벌이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가장 시급한 과제로 선정되어 대내외적으로 검찰의 강력한 단속 의지가 표명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 지방검찰청에서 관내의 조직폭력배 현황과 계보를 파악하여 7월 17일까지 대검에 보고하라는 엄중한 지시가 전국 검찰에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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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영 당시 검찰총장이 주재하는 전국 강력부장 및 민생합수부장 회의 전경 
<제공=송종의 장관>



범죄와의 전쟁이란 용어가 이로부터 1년 이상 지난 1990년 10월 13일 대통령 특별담화로 비롯되는 것이기는 하나, 사실상 범죄에 대한 선전포고는 그 검사장 회의를 통해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전국 지방검찰청에서 민생합수부 소속 검사를 구성원으로 하는 조직폭력배의 전담수사반이 즉시 발족하여 이 어려운 작업을 수행하게 된 배경이다. 그러므로 내가 대검 형사 제2부장으로 임명된 약 3개월 뒤에 이철규 변사사건이 종결됨과 동시에 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지시 이후에 관계기관의 합동단속으로 석촌호수 주변 노점상 철거가 있었다. 이어서 서울 등 대도시의 범죄 유발 유해 환경에 대한 속칭 보안사범의 일제단속이 뒤따랐다. 이런 단속으로 서민 생활을 괴롭히고 있던 조직폭력배의 활동이 곳곳에서 드러나 검경이 그동안 자세히 파악하지 못했던 조직폭력배의 계보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보고된 조직폭력배의 실상을 취합하여 보니, 대도시의 유흥가 등을 무대로 상당한 범죄조직이 암약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범죄조직의 계보에만 들어 있다 해서 이들을 처벌할 수는 없는 데다, 그 조직의 수괴 또는 간부 등은 전면에 나서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 조직원을 조종하여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될 뿐, 그 소재조차 분명치 않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을 검거하여 처벌하는 첩경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에 규정된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하여 처벌하는 것인데, 이 범죄단체조직죄는 수사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법리상 적용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범죄라는 점이 문제였다.

 

나의 서울지검 평검사 시절, 이 법률의 범죄단체조직죄의 수괴로 기소했던 김태촌이란 자가 법원에서 결국 무죄선고를 받게 된 내용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이는 물론 내 수사상의 잘못으로 초래된 결과이기는 하나, 범죄단체조직죄에 대한 법관의 인식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는 사건이었다.

검찰 내부의 사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검사들이 무죄의 결과가 두려워 특별법 조항을 잘 적용하지 못했던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왜냐하면 오래전부터 검사의 인사 평정 자료로 무죄 평점이라는 항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법무부 검찰국과의 협의를 거친 다음 상부에 보고하여 이 조직폭력배에 대한 특별법 적용으로 무죄가 선고되더라도 이를 인사고과에 일절 반영하지 않기로 방침을 굳혔다. 전국 검찰에 이 취지를 알리면서 범죄조직의 실체가 판명된 때에는 반드시 이 특별법을 적용하여 기소하라는 특별 지시가 내려갔다.

 

대검에서는 일선 검찰에서 보고된 조직폭력배의 계보를 종합적으로 취합하여 분석한 후 반드시 검거해야 할 두목급 조직폭력배 30명의 명단을 확정하여 검경이 합동으로 이들의 검거에 착수했다. 그 이후 치안본부에서는 ‘조직폭력배 소탕 100일 작전’이란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계획을 구체화하여 위 30명을 A급으로 분류하여 우선 검거 작전에 돌입하고, B급 29명, C급 38명을 가려내어 도합 101명의 거물급 조직폭력배 검거에 나서게 된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 2월에 서울지검 민생 특수부에서 우리나라 조직폭력의 3대 패밀리의 하나인 양은파 일당 7명이 검거된 것을 시작으로 각 지역에서 그 지역 조직폭력배의 검거가 잇따랐다.

 

그해 4월 하순부터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조직폭력배의 대부라 할 만한 김태촌에 대한 내사가 시작되어 그는 드디어 그해 말경에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상징성이 큰 사건이었다. 조직폭력계에서 대부로 칭송받던 사람이 범죄와의 전쟁 와중에서 백주에 대로를 활보한다면 국민이 조직폭력배의 소탕 작전이 성공했다고 믿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우회라는 이름의 폭력 범죄조직을 구성한 수괴로서 특별법에 따라 징역 10년의 형을 선고받고 다시 수감되어 복역하게 된다. 이 사람이 전생에 나와 어떤 관계에 있었기에 나의 평검사 시절, 당시 아무도 솔선해서 적용하려 하지 않았던 범죄단체조직죄의 적용을 받아 서방파라는 폭력조직의 수괴로 기소되었으나 무죄판결로 석방되더니, 20여 년 후에 나의 직접 지휘로 민완 검사들의 손에 걸려 같은 죄목으로 유죄판결을 선고받아 결국 장기 복역하게 되었으니, 이런 인연을 악연(惡緣)이라 하는가? 나도 모를 일이로다.

 

대도시 유흥가 등 무대로 범죄조직 암약
배후에서 조직원 조종…소재는 오리무중
조직폭력배 30명 명단 확정…검거 총력
양은파 일당 7명 검거 이후 잇따라 쾌거
조직폭력배 대부 김태촌 구속은 상징적

‘민생치안 확립’ 사정 관계 장관회의 배석
부족한 예비비 지원액 딱한 사정 등 호소
“다리 건설 1년 늦추고 예비비로 돌려라”
총리 특별지시로 검찰 예비비 갈증 해결
‘범죄와의 전쟁’ 종합자료 못 남겨 아쉬움


민생치안 예산 확보 과정에 있었던 에피소드 한 개를 적어 둔다.

 

부끄럽게도 민생치안의 확립이란 명제가 국정의 제1의로 된 시기였으므로 대내외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천명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국민을 안심시켜야 할 필요가 절실하였으므로 국무총리 주재 사정관계 장관회의가 빈번히 개최되고 있었다.

그 회의에 참석하는 내각의 장관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내무, 법무, 문교, 문화, 보사부 각 장관과 총무처 장관, 법제처장, 서울특별시장 등 장관급 기관장을 구성원으로 하는 회의였다. 이 회의에는 내무부 치안본부장, 대검 형사 제2부장, 청와대 행정수석과 민정수석 등이 배석했다. 국무총리 집무실 옆 대회의실에서 이런 회의가 여러 번 열렸다.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각 부처의 추진 계획과 추진 실적을 보고하고 토의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어느 날 그 회의에서 내무부 치안본부장이 범죄 예방을 위한 시책으로 ‘C³ System’ 구축 계획을 보고한다고 하기에 그 관계 자료를 미리 입수하여 검토해 보니 ‘C³’라는 것이 Command, Control, Communication의 이니셜인 세 개의 C를 따서 만든 범죄 예방 및 진압 시책으로서 이 시스템 구축에 상당한 예산이 소요되는 것임을 알았다. 그 내용을 미리 숙지한 다음 경찰에 대한 지원 사격을 해 주기로 작정하고 법무부 장관을 수행하여 그 회의에 참석했다.

내무부의 보고에 이어 법무부 장관의 보고가 끝난 다음 국무총리로부터 발언의 기회를 얻어 나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범죄의 진압과 단속보다 범죄는 미리 예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경찰의 범죄 예방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범죄 진압의 예산과 함께 그 예방을 위한 예산이 시급한 것으로 판단된다. 경찰이 요구하는 예산은 정부 차원에서 적극 배려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내무부를 지원 사격하는 의견을 말한 다음, 검찰의 입장을 부연 설명했다.

우리 검찰은 경찰과 달라서 이런 범죄 예방이 검찰의 본연의 임무가 아니므로 어떤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할 겨를이 없다. 우선 국민 생활의 안정을 해치는 범죄를 우선적으로 가려내 처단함으로써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검찰이 당면한 시급한 정책과제이다. 법무부에서 민생치안 예비비 지원의 필요성과 그 소요액을 구체적으로 보고했으나 이에 덧붙여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검찰이 요구하는 민생치안 예비비가 우리나라 예산 전체로 보아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 것인지 나는 예산을 모르는 사람이므로 알 수 없다. 그런데 어림짐작으로 추리해 보면, 검찰이 요청하는 이 예비비 전액은 어느 지방도로의 낡은 다리 하나를 보수하거나 새로 짓는 비용보다 별로 많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규모도 못 되는 민생치안 대책 예산마저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검찰의 딱한 처지를 잘 살펴 주면 좋겠다. 어느 지방도로 신설 계획에 들어 있는 다리 하나의 건설 기간을 1년 늦추어 잡고, 그 돈을 검찰에 배정해 주시면 어떻겠는가?


컴퓨터를 예로 들어 검찰이란 기관의 특징을 설명한다면 검찰은 인풋(Input)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아웃풋(Output)이 있는 기관이다. 이 민생치안 예산을 호주머니에 넣고 집에 갈 검사는 만 명에 한 명도 없으니 검찰의 딱한 처지를 이해하여 요청하는 예비비를 꼭 지원해 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나를 응시하면서 이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강영훈 총리께서 부총리를 보며 “송 검사장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시오?”라고 물으니, 그는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잠시 후 강 총리님께서 하신 말씀이 걸작이었다.

 

“송 검사장이 말하는 다리가 어느 도로에 세울 다리인지는 내가 모르겠으나 그 다리의 건설을 1년 늦추고 그 돈을 예비비로 검찰에 주시구려!”

내가 예로 들었던 다리 놓는 이야기는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다. 이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서울법대 후배였던 기획원 예상실의 담당 국장과 예산 이야기를 나누면서 각별한 배려를 요청했더니, 그 국장이 이런 일은 반드시 총리의 특별 지시가 있어야 할 듯하니 이러저러한 말을 하면 아마 총리님께서 무슨 말씀이 있을 것이라고 하며 미리 귀띔하기에 그가 가르쳐 준 대로 앵무새처럼 말했던 내용이다. 이 사람은 나의 서울법대 산악반 후배로서 차관급 초대 예산청장을 거쳐 장관급인 국무조정실장을 역임한 안병우(安炳禹)다.

나는 범죄와의 전쟁 시작부터 최전방에 서서 그 전쟁을 지휘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그 전쟁의 승패를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것이 바로 역사의 평가 대상이다. 나는 전쟁의 종식 선언을 한 바 없이 그 전장의 최전선에서 떠났다. 나는 범죄와의 전쟁 전초전인 기간을 포함하여 2년여에 걸친 전쟁 내용만을 알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2016년 1월 21일 인터넷의 어떤 자료를 검색해 보았더니 “범죄와의 전쟁 2년간 조직폭력배 274개 파가 색출되어 1,421명이 검거되었으며 그중 1,080명이 구속되었는데. 이런 ‘빛나는 전과’엔 희생도 따랐다. 경찰 126명이 순직하였으며, 2,2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 내용이 어떤 자료를 근거로 쓴 것인지는 모르나 내가 대검이나 어떤 정부 기관에 물어보더라도 정확한 내용을 확인할 방도는 없다. 내가 스스로 이 범죄와의 전쟁에 관한 종합적인 자료를 만들어 대검에 남기지 못하고 대전지방검찰청의 검사장으로 부임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내 탓이다.

조직폭력배의 검거 당시 현장 출동 경찰관에게는 특별한 배려로 총기 휴대가 허용되어 경찰이 이들로부터 피해당한 사례는 나의 재임 중 없었다. 그러나 범죄와의 전쟁이 치러지는 기간에는 정권의 체제에 저항하는 각종 불법집회와 폭력시위가 난무하는 시절이었으므로 이에 대처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경찰관의 피해 내용은 사실일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이 이런 불법행위에 대처하기에 급급하여 경찰 본연의 임무인 민생치안의 소임을 다할 수 없어서 검사가 이들과 함께 범죄 현장에까지 나타나 민생합수부장의 이름으로 경찰을 지휘하여 범죄를 적발하고 단속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불행한 역사! 이것이 ‘범죄와의 전쟁’이었다.

 



범죄와의 전쟁은 조직폭력배 뿐만 아니라 마약사범에 대한 전쟁이기도 했다. 1980년대 국제적으로 마약 남용과 불법 거래가 크게 성행하여 1987년에는 유엔 총회에서 6월 26일을 마약퇴치의 날로 정했다. 국내에서도 각성제인 메스암페타민(히로뽕, ice) 사범이 격증하면서 전직 대통령의 자제와 유명 인사들까지 남용한다는 소문이 도는 등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당시 세계 3대 마약은 헤로인, 코카인과 메스암페타민이었다. 헤로인을 수출하는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의 태국, 버마, 라오스와 코카인을 수출하는 콜롬비아 등 남미의 국가들과 함께 메스암페타민을 수출하는 한국은 마약수출 국가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특히 일본 대표들은 자기 나라에 밀반입되는 메스암페타민의 70% 이상이 한국산인데 한국은 단속에 소극적이라고 비난했다. 미국 마약청도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서부 지역에 밀반입되는 메스암페타민의 거의 모두가 한국산이라면서 성의 있는 단속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정부는 위와 같은 국내외 사정을 고려하여 1989년 2월 보사부 소속 마약감시원 57명을 검찰로 이체하면서 대검찰청 형사제1부에 마약과를 창설했다. 그 직원들을 전국 검찰청에 분산 배치하고, 각 청에 마약 전담검사가 지명되어 수사체재를 갖추었다. 이 마약과가 강력부로 소속으로 바뀌어 내 지휘를 받게 된 것이다.

마약과는 메스암페타민 문제를 단시간에 해결하기 위해서 남용 사범보다 공급 조직에 대해 집중적으로 수사하는 방안을 택했다. 한편으로는 대만에서 수입되는 원료인 염산에페드린의 밀반입을 차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의 제조 유통 조직을 검거하는 대책이 수립되었다.

그 이전 10년 동안 검찰과 경찰에서 검거된 적이 있는 메스암페타민 제조와 유통업자들의 조직 계보도가 만들어져 전국 마약 전담검사에게 배포되고, 이들에 대한 내사를 개시했다. 계보도에 나타난 상당히 많은 사람이 아직도 제조와 유통에 관여하고 있는 사실이 적발되면서 중요 혐의자들이 속속 구속되었다. 부산 지역 메스암페타민의 대부 최재도, 마약왕 이황순도 구속되었고, 또 서울 지역의 대표적 제조자였던 윤재성은 사망하였으나 그 부인이 피터팬 아동복을 생산하면서 검찰청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메스암페타민을 제조하고 있는 사실이 발각되어 구속되었다.

제조와 유통 조직이 붕괴되면서 한국에서 메스암페타민 품귀 현상이 일어나 가격이 크게 뛰어올라 일본에 밀반출되었던 것이 한국에 역반입되는 사례까지 나타났다. 일본에서 적발되는 한국산 메스암페타민이 1989년에는 12%로 격감하고, 1990년에는 0%가 되었다. 그 후 10년 이상 한국산 메스암페타민이 일본에 반입된 사례가 단 한 건도 적발되지 않아 0% 행진을 계속하는 참으로 경이로운 수사 성과를 이루어냈다. 1991년의 유엔 보고서에도 한국이 단기간에 마약 단속을 성공시킨 국가로 기록되었다. 메스암페타민 수출국으로 비난받던 대한민국을 2년 만에 마약 청정국으로 만들어 낸 것은 마약 전담 검사들의 사명감과 열정 때문이었다.

폭력조직이 마약 거래를 자금원으로 삼으면 통제 불능의 수준으로 조직이 커지기 마련이다. 일부 국가에서는 정부군과 대치하는 정도에 이르기도 했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는 적절한 시기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조직폭력배와 함께 마약 공급 조직까지 진압한 것이다. 두 조직의 연계를 미리 차단한 매우 희귀한 성공 사례가 되어 국제적으로 큰 칭송과 부러움을 받게 되었다. 범죄와의 전쟁이 승리한 성과로서, 대검 강력부의 창설 목적을 1차적으로 실현해 낸 마약전담 검사들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한국도 ‘히로뽕’ 수출국으로 지목받아
1989년 대검 형사1부에 마약과 창설
국내 제조·유통조직 검거 대책 수립
거물급 잇단 검거로 유통조직 붕괴
일본서 적발된 한국산 1990년 0%로

마약 단속 성공사례 국제적으로 알려져
태국·러시아·영국 등 방문 자문도 응해
국제적 마약단속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
마약 단속 실무자 국제협력회의도 창설
‘특별연수회’서 美마약청 감사패도 받아


검찰의 성공적인 마약사범 단속 실적이 연이어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노태우 대통령은 마약 퇴치 유공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직접 치하하고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내가 1990년 9월 10일 강력부장 재직 시에 받은 황조근정훈장이 그중의 하나다.

한국이 이처럼 뛰어난 마약 단속 성과를 이룬데 힘입어 마약과장 유창종은 1990년 10월 아직 미수교 상태인 중국의 북경에서 개최된 유엔 마약법집행기관장회의에 참석하여 부의장으로 피선되어 활약하였다. 심지어 야당이던 평민당 김대중 총재의 지시로 1990년 11월 평민당 마약퇴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위원회가 주최하는 마약 퇴치 세미나에 마약과장이 참석해서 발표하는 일까지 있었다.

 

한국의 마약 단속 성공 사례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외국에서의 초청과 자문요청이 늘어났다. 유 과장은 국내 주재 외국 대사관과의 회의와 유엔 회의 참석을 이용하여 성공 사례를 설명하는 외에 태국 마약청과 러시아 내부무 마약단속국을 방문하고, 영국 외무성 초청으로 여러 지역의 마약사범 단속 기관을 방문하며 자문에 응하기도 했다.

이런 사정으로 검찰에서는 유창종 검사를 ‘유 대사’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는 내가 대검 형사 제2부장으로 부임하기 전에 이미 형사 제1부의 마약과장이었으며, 내가 강력부장직을 마친 이후에도 그 직책을 수행하다가 나의 대전지검장 재직시인 1992년에야 비로소 그 직을 떠나 서울지검 남부지청의 특수부장으로 전보되었다. 그의 마땅한 후임자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마약과장 재직기간은 3년 6개월이나 된다. 1993년 3월, 내가 대검 중앙수사부장에서 서울지방검창청 검사장을 부임할 당시의 인사발령으로 그는 서울지방검찰청의 제5대 강력부장이 되었다.

마약 단속과 관련해서 스스로 자랑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한국 검찰이 국제적인 마약 단속 네트워크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원료인 염산에페드린은 대만에서 제조한 뒤 메스암페타민은 한국에서 제조하고, 소비는 일본과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삼각의 유통구조였다. 한국의 제조 조직이 붕괴된 이후에 원료는 전과 같이 대만이 공급했으나 완제품 제조 장소는 중국과 필리핀 그리고 북한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소비는 한국과 일본, 미국에서 이루어져 관련국들의 협력 없이는 제대로 단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메스암페타민 가격이 폭등하게 되자 남미의 각성제인 코카인이 대체 마약으로 일본과 한국에 밀반입되기 시작해서 국제협력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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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대검 강력부 주관으로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서 열린 검찰 마약수사요원 특별연수 기념촬영. 왼쪽에서 두번째부터 송종의 당시 강력부장, 도널드 그레그 주한 미국대사, 김기춘 당시 검찰총장. 뒷 왼쪽 첫번째 유창종 당시 마약과장.

   
국제협력 증진을 위해 마약과는 1989년부터 한국 주재 외국 대사관 직원들을 불러 분기별로 국제협력회의를 개최했다. 1990년부터는 각 나라 마약 단속 조직의 실무책임자들까지 참석하는 확대 국제협력회의(ADLOMICO)를 창설했다. 첫 확대 국제협력회의는 1990년 6월 제주도에서 개최되었고, 이때만 해도 한국, 대만, 일본, 미국 등 4개 나라의 대표와 한국의 관련 부서가 참석하였다. 그 뒤 참석 국가도 많이 늘어나고, 유엔 마약 관련 기구와 인터폴 그리고 각국의 장관급 최고 책임자들까지 참석하여 국제적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처음에는 마약과장 혼자 사회를 보면서 주재하던 회의에 대검 강력부장이 개회식에 참석하여 격려하고, 그 후 검찰총장이 개막식에 직접 참석하여 격려하는 회의로 격상됐다. 내가 강력부장을 떠난 뒤에도 계속 발전해서 최근 유엔에서 가장 성공적인 마약 단속 국제협력회의로 성장하고, 한국은 아태지역 마약단속의 명실상부한 주도국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니 오직 검찰 후배들에게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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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법무부 마약청에서 대검 강력부장에게 보낸 감사패 <제공=송종의 장관>

 

미국 법무부(DEPARTMENT OF JUSTICE)의 마약청(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에서 보내온 감사패가 내게 아직 남아 있다. 대검 강력부 주관으로 1989. 11. 6-17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검찰 마약수사요원 특별연수가 있었다. 미국 마약청의 교관 5명이 검찰의 마약수사요원 30여 명에게 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코카인 등을 소개하고 선진 마약수사 기법과 경험을 전수하는 교육이었다. 본격적인 교육 전날인 11월 5일 나는 주관 부서의 책임자로서 교관을 포함한 참석자 전원을 위해 오찬을 주재하며 난생처음 영어로 격려사를 해보았다.

11월 17일의 수료식에는 김기춘 총장, 도널드 그레그 주한 미국대사 등도 참석했고, 교육 참여자들에게는 수료증이 수여되었다. 미국 마약청에서는 위와 같은 교육 개설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나의 이름을 동판에 영문으로 새겨 감사패를 보낸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이 이름이 잘못되었다. 그 이름은 나의 이름이 아니라 ’유 대사‘의 이름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변호사법 개정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고 김택현 대한변협 협회장께서 내게 보내주신 감사패를 수십 년간 보관해오다가 현 이종엽 대한변협 협회장에게 역사적인 기념물로 다시 반환하여 변협에 기증한 것처럼 미국 마약청장에게 이를 역사적인 유물로 다시 돌려드리는 일이 생기면 좋으련만 과연 내 생전이나 사후에 이런 일이 있을런지 알 수 없다.

범죄와의 전쟁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반열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민이 겪은 이 어두운 역사가 있었음을 나의 생전에 알려 두기 위해 나는 지금까지 보존해 온 모든 자료를 소상하게 검토한 다음,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며 이 글을 썼다. 우리나라의 어떤 정사(正史)에도 없을 내용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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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범죄와의 전쟁을 치르며 모셨던 상사는 다음과 같다.

0. 법무부 장관
허형구(許亨九. 1988. 12. 5. - 1990. 3. 18.)
이종남(李種南. 1990. 3. 19. - 1991. 2. 16.)
0. 검찰총장
김기춘(金淇春. 1988. 12. 5. - 1990. 12. 4.)
정구영(鄭銶永. 1990. 12. 6. - 1992. 12. 5.)
0. 대검찰청 차장검사
최상엽(崔相曄. 1987. 5. 30. - 1990. 3. 19.)
서정신(徐廷信. 1990. 3. 27. - 1991. 4. 17.)

나를 도와준 형사 제2과장은 김대웅(金大雄)이었고, 강력과장은 정홍원(鄭烘原), 황성진(黃性珍)이었으며, 마약과장은 유창종(柳昌宗)이었다.


나의 대검찰청 강력부장 재직기념패에는 황성진, 유창종 두 사람의 이름과 강력과 마약과 직원 일동이라고 새겨져 있다. 김대웅, 정홍원 두 사람은 나의 재직 중 중앙수사부 제3 및 제4과장으로 각 전보되었다.

각 지방검찰청 강력부 또는 민생침해사범 합동수사부 소속 검사로 이 범죄와의 전쟁의 최일선에 서서 밑은 바 소임을 다한 검사들의 이름을 여기에 기록으로 남겨 두고 싶으나 안타깝게도 내게 그런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 기간에 검사들의 인사이동이 예정된 때에는 그 명단과 특별한 공적을 정리하여 검찰 수뇌부에 제공함으로써 인사에 반영되도록 나름대로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음을 부기함에 그친다.

모두 금생에 좋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