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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책

[내가 쓴 책] 《법정의 얼굴들》 (박주영 부장판사 著, 모로 펴냄)

삶과 존재에서 부재와 상실 쪽으로 눈 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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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표정 중에 특히 좋아하는 표정이 있다. 안절부절못하고 쑥스러워하는 모습에 왠지 마음이 끌린다. 예를 들면, 쳇 베이커의 마지막 실황앨범(The Last Great Concert)의 커버 같은 표정이다. 그는 이 연주를 한 지 2주 뒤에 사망했다. 지난 삶과 현재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차마 정면을 응시하지 못하는 쳇 베이커의 얼굴을 보다 보면, 비록 약물 중독으로 엉망인 삶이었어도 당신은 멋진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고 현재에 감사하는 표정에서 알 수 없는 위안을 받는다. 수줍은 사람은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도 해가 되지 않음을 내가 알기 때문일까.

사실 법정에는 얼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정확히 말하면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다. 피고인석에서는 한없이 무해하고 선량한 표정이지만, 법정을 나서는 순간 그 얼굴을 버린다. 위선이라 단정하기는 애매하다. 석방을 향한 절박함은 거짓이 아니다. 용도를 다한 얼굴은 폐기될 뿐이다.

2005년까지 변호사를 했지만 아직도 의뢰인들의 얼굴이 기억난다. 판사가 변호사와 다른 점이 많지만, 당사자의 이름이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도 큰 차이점이다. 언제부터인가 그저 흉악한 살인범, 간교한 사기꾼, 불쌍한 피해자로만 뭉뚱그려진 잔상들이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잔인한, 측은한, 이런 단어 하나에 한 사람을 몰아넣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책을 썼다.

2020년 형사합의재판을 하며 틈틈이 쓰고 있었는데 절반쯤 쓰던 중 갑자기 몸에 문제가 생겼다. 어쩔 수 없이 휴직했고 그 기간에 원고를 마무리했다. 아프기 전에는 시선이 온통 삶과 존재 쪽을 향해 있었는데, 아픈 이후 부재와 상실 쪽에 더 눈길이 갔다. 그랬더니 오히려 삶이 더욱 부각되고 절실해졌다. 참혹한 형사법정을 스쳐 간 사람들이 남기고 간 얼굴을 그린 책이지만, 그래도 절반은 희망적이기도 한 이유가 그 때문인 것 같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하나밖에 없다. 훌륭한 인생을 사는 것이다. 훌륭한 인생을 살면 살수록 죽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며 그에 대한 공포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성자에게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존 러스킨)

사람을 연필에 비유하면 나도 이제 몽당연필이 되어간다. 생의 흑심이 닳고 있다. 두려운 건 연필의 길이가 아니다. 연필로 그린 게 아무것도 없거나, 나름대로 정성껏 끼적인 무언가의 조잡함이다. 러스킨의 말은 위안이 되다가도 스스로의 처지를 돌아보니 자꾸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 대책 없는 상실 앞에서 나는 대체 무엇으로 두렵지 않으랴.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수줍은 답변이다.

 

박주영 부장판사 (부산지법 동부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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