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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회고록]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2-3)

3부 채색(彩色) ⑫ 범죄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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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와의 전쟁’ 마지막 고비, 조직폭력배 소탕작전


대검찰청 형사 제2부장 및 강력부장 - Ⅲ

(1989. 3. 29. - 1991. 4. 18.)



대검찰청 형사 2부장으로 부임한 그해 11월 몇 번의 대대적인 단속으로 2393명을 입건해 360명을 구속했고, 그해 11월 23일 자로 실시된 범정부적 단속으로 3280명을 검거해 520명을 구속 대상자로 선정했다. 얼마나 많은 범죄가 단속 대상으로 적발됐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나 이미 확고히 뿌리 내린 조직폭력 범죄는 쉽사리 뿌리 뽑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범죄와의 전쟁이란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조직폭력배의 소탕에 관한 내용을 적는다.

정부 수립 이후 2번에 걸친 규모가 큰 조직폭력배 단속이 있었다. 첫 번째는 1960년 깡패소탕령, 두 번째는 1980년 소위 삼청교육이었다. 법치주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법의 혁명적 조치였다. 당시 시대상황에 비추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고 이런 혁명적 조치가 용인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언급하는 조직폭력배 소탕은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인 법치주의 이념을 훼손하지 않는 적법절차에 따른 수사와 법원의 판결에 따라 이루어진 범죄의 단속과 처벌이다.

그간 검·경은 조직폭력배 단속에 있어 발생된 범죄 진압과 처벌에 그쳤을 뿐, 폭력조직이 관여했는지 등 체계적인 분석이 이뤄지지 못한 상태에서 가시적인 범죄의 처벌에 그쳤다는 지적이 타당할 것이다.

범죄와의 전쟁이란 용어가 1990년 대통령 특별담화에서 비롯되긴 했으나, 사실은 그 1년 전인 대검 전국 검사장 회의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다. 당시 대검에서는 관내 조직폭력배 현황과 계보를 파악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전국 지검에 전달했다. 이것이 전국 지검에서 민생합수부 소속 검사를 구성원으로 하는 조직폭력배 전담수사반이 즉시 발족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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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영 당시 검찰총장이 주재하는 전국 강력부장 및 민생합수부장 회의 전경 
<제공=송종의 장관>


이런 지시 이후에 관계기관의 합동단속으로 석촌호수 주변 노점상 철거가 있었다. 이어서 서울 등 대도시의 범죄 유발 유해 환경에 대한 속칭 보안사범의 일제단속이 뒤따랐다. 이런 단속으로 서민 생활을 괴롭히고 있던 조직폭력배의 활동이 곳곳에서 드러나 검·경이 그동안 자세히 파악하지 못했던 조직폭력배의 계보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보고된 조직폭력배의 실상을 취합해 보니, 대도시 유흥가 등을 무대로 상당한 범죄조직이 암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범죄조직의 계보에만 들어 있다 해서 이들을 처벌할 수는 없는 데다, 그 조직의 수괴 또는 간부 등은 전면에 나서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 조직원을 조종해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될 뿐, 그 소재조차 분명치 않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범죄단체조직죄의 특별법 조항을 적용한 기소가 쉽지 않았다. 무죄 평점이라는 인사 평정 자료가 검사들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이에 법무부 검찰국과 협의해 조직폭력배에 대한 특별법 적용으로 무죄 선고가 난 경우에는 인사고과에 일절 반영하지 않기로 방침을 굳혔다. 전국 검찰청에 이런 방침에 관한 특별 지시가 내려갔다.

대검에서는 반드시 검거해야 할 두목급 조직폭력배 30명 명단을 확정했고, 검·경이 합동 검거에 착수했다. 그 이후 치안본부에서는 ‘조직폭력배 소탕 100일 작전’이란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계획을 구체화해 위 30명을 A급으로 분류, 우선 검거 작전에 돌입하고, B급 29명, C급 38명 등을 가려내 총 101명의 거물급 조직폭력배 검거에 나섰다.

1990년대 들어 3대 조직폭력배로 불리는 양은파 일당 7명 검거를 시작으로 검거가 잇따랐다. 그해 서울지검 특수부가 조직폭력배 대부라 할 만한 김태촌을 구속하는 상징성 큰 사건이 있었다. 그는 신우회라는 이름의 폭력 범죄조직을 구성한 수괴로서 특별법에 따라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다시 수감돼 복역하게 된다.

민생치안 예산 확보 과정에 있었던 에피소드 한 개를 적어 둔다.

 

대도시 유흥가 등 무대로 범죄조직 암약
배후에서 조직원 조종…소재는 오리무중
조직폭력배 30명 명단 확정…검거 총력
양은파 일당 7명 검거 이후 잇따라 쾌거
조직폭력배 대부 김태촌 구속은 상징적

‘민생치안 확립’ 사정 관계 장관회의 배석
부족한 예비비 지원액 딱한 사정 등 호소
“다리 건설 1년 늦추고 예비비로 돌려라”
총리 특별지시로 검찰 예비비 갈증 해결
‘범죄와의 전쟁’ 종합자료 못 남겨 아쉬움


당시 민생치안 확립을 목표로 국무총리 주재 사정관계 장관회의가 빈번히 개최됐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내무, 법무, 문교, 문화, 보사부 각 장관과 총무처 장관, 법제처장, 서울특별시장 등 장관급 기관장을 구성원으로 하는 회의였다. 이 회의에는 내무부 치안본부장, 대검 형사 2부장, 청와대 행정수석과 민정수석 등이 배석했다.

어느 날 그 회의에서 내무부 치안본부장이 범죄 예방을 위한 시책으로 ‘C Cube System’ 구축 계획을 보고한다고 하기에 그 관계 자료를 미리 입수해 검토해 보니 ‘C Cube’라는 것이 Command, Control, Communication의 이니셜인 세 개의 C를 따서 만든 범죄 예방 및 진압 시책으로서 이 시스템 구축에 상당한 예산이 필요함을 알았다. 경찰에 대한 지원 사격을 해 주기로 작정하고 회의에 참석했다.

장관들의 보고가 끝난 후 나는 국무총리로부터 발언의 기회를 얻어 범죄 진압과 단속에 앞서 범죄 예방의 중요성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또 우리 검찰에 할당된 민생치안 예비비 지원이 얼마나 부족한지 그 딱한 사정도 덧붙였다. 어느 지방도로 다리 하나의 건설비도 채 안 되는 예비비를 요청하는 검찰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려달라는 취지였다. 나를 응시하면서 이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강영훈 총리께서 부총리를 보며 “송 검사장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시오?”라고 물으니, 그는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잠시 후 강 총리께서 하신 말씀이 걸작이었다.

“송 검사장이 말하는 다리가 어느 도로에 세울 다리인지는 내가 모르겠으나 그 다리의 건설을 1년 늦추고 그 돈을 예비비로 검찰에 주시구려!”

내가 예로 들었던 다리 놓는 이야기는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다. 이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서울법대 후배였던 기획원 예산실의 담당 국장과 예산 이야기를 나누면서 각별한 배려를 요청했더니, 그 국장이 이런 일은 반드시 총리의 특별 지시가 있어야 할 듯하니 이러저러한 말을 하면 아마 총리께서 무슨 말씀이 있을 것이라고 하며 미리 귀띔하기에 그가 가르쳐 준 대로 앵무새처럼 말했던 내용이다. 이 사람은 나의 서울법대 산악반 후배로서 차관급 초대 예산청장을 거쳐 장관급인 국무조정실장을 역임한 안병우다.

범죄와의 전쟁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반열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민이 겪은 이 어두운 역사가 있었음을 나의 생전에 알려 두기 위해 나는 지금까지 보존해 온 모든 자료를 소상하게 검토한 다음,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며 이 글을 썼다. 우리나라의 어떤 정사(正史)에도 없을 내용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함이다.

이 글을 쓰는 2016년 1월 21일, 인터넷의 어떤 자료를 검색해 보았더니 “범죄와의 전쟁 2년간 조직폭력배 274개 파가 색출되어 1421명이 검거되었으며 그중 1080명이 구속되었는데. 이런 ‘빛나는 전과’엔 희생도 따랐다. 경찰 126명이 순직하였으며, 22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 내용이 어떤 자료를 근거로 쓴 것인지는 모르나 내가 대검이나 어떤 정부 기관에 물어보더라도 정확한 내용을 확인할 방도는 없다.

나는 범죄와의 전쟁 시작부터 최전방에 서서 그 전쟁을 지휘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그 전쟁의 승패를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것이 바로 역사의 평가 대상이다. 나는 전쟁의 종식 선언을 한 바 없이 그 전장의 최전선에서 떠났다. 나는 범죄와의 전쟁 전초전인 기간을 포함하여 2년여에 걸친 전쟁 내용만을 알고 있다. 내가 스스로 이 범죄와의 전쟁에 관한 종합적인 자료를 만들어 대검에 남기지 못하고 대전지검의 검사장으로 부임했으니 이는 오로지 내 탓이다.

조직폭력배 검거 당시 현장 출동 경찰관에게는 특별한 배려로 총기 휴대가 허용돼 경찰이 이들로부터 피해당한 사례는 나의 재임 중 없었다. 그러나 범죄와의 전쟁이 치러지는 기간에는 정권의 체제에 저항하는 각종 불법집회와 폭력시위가 난무하는 시절이었으므로 이에 대처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경찰관의 피해 내용은 사실일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이 이런 불법행위에 대처하기에 급급해 경찰 본연의 임무인 민생치안의 소임을 다할 수 없어서 검사가 이들과 함께 범죄 현장에까지 나서 민생합수부장의 이름으로 경찰을 지휘해 범죄를 적발하고 단속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불행한 역사! 이것이 ‘범죄와의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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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와의 전쟁 수행 중 법무부 장관은 허형구, 이종남. 검찰총장은 김기춘, 정구영. 각 두 분이었다. 나를 도와준 형사 2과장은 김대웅, 강력과장은 정홍원, 황성진, 마약과장은 유창종이었다.

나의 대검 강력부장 재직 기념패에는 황성진, 유창종 두 사람의 이름과 강력과, 마약과 직원 일동이라고 새겨져 있다. 김대웅, 정홍원 두 사람은 나의 재직 중 중앙수사부 제3 및 제4과장으로 각 전보됐다.

전국 각 지검의 강력부 또는 민생침해사범 합동수사부 소속 검사로 이 범죄와의 전쟁의 최일선에 서서 밑은 바 소임을 다한 검사들의 이름을 여기에 기록으로 남겨 두고 싶으나 안타깝게도 내게 그런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 기간에 검사들의 인사이동이 예정된 때에는 그 명단과 특별한 공적을 정리해 검찰 수뇌부에 제공함으로써 인사에 반영되도록 나름대로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음을 부기함에 그친다. 모두 금생에 좋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었다.


<정리=박솔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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