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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회고록]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2-1)

3부 채색(彩色) ⑫ 범죄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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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한 뇌관 민주조선 편집장 이철규 변사사건


대검찰청 형사 제2부장 및 강력부장 -Ⅰ

(1989. 3. 29. - 1991. 4. 18.)


대검찰청 형사 2부는 1989년 형사 1부에 있던 마약과가 강력부로 이관되며 확대 개편되기 전까지는 소속 부서로 형사 2과만 있는 인원 20명 미만의 작은 부서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허형구 법무부 장관께서 나를 대검 형사 2부장으로 발령한다면 본인이 섭섭히 여기리라는 뜻을 검찰총장에게 표했을 것이다.


어쨌든, 형사 2부장 재임 중 출범한 강력부로 인해 나는 초대 강력부장이 됐다. 이 시기는 제13대 대통령인 노태우 씨가 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에 따라 민선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다. 이름은 서로 다르나 본질적 업무는 같았던 두 직책을 지내던 중, 역사적인 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후인들이 참고해야 할 여러 시사점을 주는 일들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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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광주지검 건물 
<사진=대검찰청 박현철 대변인 제공>


첫 번째는 ‘조선대생 이철규 변사사건’이다. 형사 2부장으로 부임한 지 한 달 남짓한 때 일어난 사건이다.


1989년 5월 10일 광주지방검찰청의 변사체 발견 보고가 있었다. 전남 광주시에 있는 조선대학교의 교지인 『민주조선』의 편집위원장인 이철규라는 사람이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요지의 보고였다.


당시는 검찰, 경찰, 안기부 등으로 공안합동수사본부가 구성돼 학생과 근로자들의 불법시위에 대한 수사가 한창이던 때였다. 이철규는 위 『민주조선』 발간과 관련해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당국에 지명수배된 자였다. 당시 조선대학교 구내에는 북한의 선전·선동 내용을 그대로 전파하는 듯한 반정부적 내용의 각종 현수막과 대자보가 걸려 있었다. 검찰, 경찰 등 수사기관이나 어떤 정보기관도 이 대학 구내에는 출입할 수 없었음은 물론, 만약 진압 작전이 벌어진다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어 이런 불법행위에 대해 국가공권력이 어떤 마땅한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변사체가 조선대 학생인데다 교지인 『민주조선』의 편집장으로 지명수배된 사람이므로 그의 사인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 사건이 일으킬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대검 공안부에서 다뤄야 할 사안이었으나, 공안부 지휘로 변사사건의 전모를 규명한다면 대외적으로는 물론 광주 지역의 시민 정서상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사건 수사 지휘를 대검 형사 2부에서 맡기로 했던 것이다.


당시 광주지방검찰청의 검사장은 유순석(柳淳錫), 차장검사는 심상명(沈相明), 사건 전담 형사 1부장은 김각영(金珏泳)이었다. 김 부장검사는 내가 서울지검 특수 제1부장일 때 그 부 수석검사였으므로 서로를 잘 아는 사이였다. 정치적 또는 대외적 문제 이외의 수사 세부내용은 대부분 내가 김 부장검사에게 직접 지시했다. 전달 과정에서 착오가 없도록 하려는 취지였다.


변사체 발견 20일 후에 광주지검에서 종합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발표 내용을 요약한 공중파 방송의 보도는 다음과 같다.


“조선대생 이철규 군 변사사건을 수사해 온 광주지검은 오늘 아침 최종 수사 결과 이 군이 3일 밤 10시 56분쯤 광주시 청옥동 청암교 밑 석축에서 실족 추락에 의해 익사한 것으로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하기로 했으며 타살 가능성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조선대 교지 민주조선 창간호와 관련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 중이던 이 군이 지난 3일 밤 10시 12분쯤 광주시 청옥동 제4수원지 다리에서 경찰의 검문을 받자 산속으로 도주해 경찰관의 추적을 피해 철조망을 지나 수원지로 들어간 뒤 사파리 점퍼를 벗어 두고 만일의 체포에 대비해서 운동권 학생들의 인적 사항이 적힌 메모지를 찢어 버렸으며, 철조망 안쪽 언덕과 습지를 따라 청암교 밑을 지나 상류 쪽으로 달아나던 중 다리 밑 석축에 이르러 음력 그믐밤의 어두운 상황에 진흙이 묻은 구두를 신고 급히 통과하려다 밤 10시 56분쯤 실족해 빠져 익사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검찰은 또 공개 사체 부검 후, 폐 등 12점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공개 감정하고 유류품 62점을 수거 감정하는 한편, 8차례에 걸친 현장 실황 조사 결과 살해 후 유기 가능성 등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서 이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말하고 사체의 재부검은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업무일지에 기록된 수사 과정은 이렇다.


변사체 발견 직후 광주지검에 수사전담반이 편성돼 관계자의 입회하에 철저한 부검이 진행됐다. 광주지검에서 대검에 보고되는 모든 내용은 청와대의 민정, 정무, 행정 등의 각 라인을 통해 신속히 전파됐으며 당시의 집권당인 민정당에도 그 내용을 알려야 했다. 이 변사사건이 타살 혐의가 있는 사건으로 규명될 경우를 대비한 사전 조치였다. 이 사건의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정치적인 공세가 이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검찰이 예상한 대로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이런 사태는 이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특위의 활동이 마무리되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당시 해외 언론도 이 사건을 주목했고, 청와대에서는 언론인 출신 정치인 K 박사를 단장으로 하는 TF까지 구성했다. 제6공화국 정권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될 것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와의 연석회의 시 그들의 요청사항은 다음과 같다.


“칠흑 같은 그믐날 한밤중에 일어난 일이라 하더라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에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다보면서 이철규가 검문을 피해 달아나 실족 지점에서 추락해 익사한 전 과정을 영화 보듯 생생히 재연하는 것 같이 수사해 그 내용대로 수사 결과를 발표해 달라.”


광주지검의 수사 결과 발표 이틀 뒤인 1989년 6월 1일 검찰에서 이미 예상한 대로 국회 국정조사특위 위원 전원이 광주지검에 도착해 국정조사 활동이 시작됐다. 이들은 모든 수사 기록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원래 수사 기록을 대외적으로 공표할 수 없음은 형사소송법상 당연하다. 광주지검이 그 요구에 순순히 응할 수는 없었으므로 검사장이 그 요구에 응하지 않았음은 불문가지다. 이로써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게 된다. 야당인 평민당 의원들이 국정조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때 나는 전날인 5월 31일부터 인천지검 사무감사로 대검에 있지 않았다. 대검 수뇌부로부터 심상치 않은 사태임을 듣고, 즉시 상경해 대책 마련에 골몰했다. 만약 국회 국정조사가 검찰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해 이뤄지지 못한다면 이 정치적인 책임을 어떻게 검찰이 질 수 있겠는가? 타협점을 찾아 해결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보안법위반 혐의’ 지명 수배된 이철규
광주 청옥동 수원지서 변사체로 발견
진상조사는 공안부 아닌 대검 형사2부
사체 부검서도 유기·살해 가능성 못 찾아
검문 피해 도주하다 ‘실족 추락 익사’ 결론

수사 결과 발표 이틀 뒤 국회조사단 도착
대외 공표할 수 없는 수사기록도 제출 요구
‘열람하되 비공개’ 제안으로 국정조사 재개
위원장 “조속 장례 희망” 발표로 조사 매듭
검찰, 의연한 자세로 사건처리에 자부심

 

광주지검장에게 다음과 같은 대검 지시가 내려갔다.


1) 기록을 열람하되 비공개로, 광주지검과 숙소 이외의 장소에서는 이를 열람할 수 없다.


2) 긴요하다고 인정되는 수사 기록을 복사해 제출하되, 그 부분을 특정해 2부를 복사하고, 각 당에 1부씩 제공한다.


3) 복사되는 기록 중 수사 기록에 나타난 사람의 인적 사항이 외부에 누설됨으로써 그 사람이 입게 되는 피해의 예방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이를 제외하거나 그 인적 사항을 가리고 복사한다.


4) 열람 후에는 즉시 이를 회수한다.


5) 열람한 사실이 사후 외부에 누설되지 않도록 국회의원들에게 철저히 당부한다.


우선 이 정도의 돌파구를 찾아 국회의원을 국정조사 현장으로 다시 모셔 오라는 지시가 광주지검에 전달됐다. 검찰의 이런 양보로 국회 국정조사는 재개될 수 있었다.


예외 없는 원칙이 어디에 있을 수 있는가? 원칙만을 고집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은 이 사례가 보여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 사건 수사 결과 발표 직후부터 야당 측은 변사체 재부검을 강력히 요구하는 정치적 공세를 강화했다. 국정조사특위에서 50여 명에 대한 증인 신문을 진행하면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해 정치적 공세를 벌이자 민정당의 요구로 당정 협의가 진행됐고 민정당조차 이런 여론을 외면할 수 없었던지 변사체에 대한 재부검 문제를 제기했다. 특위로서는 정치적 해법을 찾아야 했기에 검사장의 증인선서와 함께 변사체에 대한 재부검 문제에 관한 표결 가능성도 있었다.


광주 검사장이 특위에 다시 출석해 추가 수사 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1989년 6월 17일 국회 특위는 재부검을 요청하는 내용의 공문을 검찰에 보내왔다. 그 3일 후인 6월 20일 국회 국정조사단이 다시 광주지검에 와 국정조사를 했고, 그날 위원장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검찰에서는 오늘 여러 위원님께서 질문을 통해 지적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참고하시고 추가 부검의 필요성, 배경 등을 또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실시 방법은 검사장 책임하에 실시하되 6월 27일이 국정조사 만료 기간이므로 추가 부검 조치 결과를 6월 27일 전까지 통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사 기간 만료 하루 전, 검찰은 검토 결과 추가 부검이 불필요하므로 실시하지 않겠다는 공문을 국회에 보냈다.


국정조사 만기일인 6월 27일, 특위 위원장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가 발표됐다.


“변사자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하며 조속한 장례를 희망한다. 이 사건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 내용에 대한 국민의 제보를 요망한다. 검찰의 추가 부검 거부와 자료 제출에 관련한 사태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


위와 같은 경위로 국회의 국정조사는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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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나는 광주지검을 공식 방문해 검사장과 이하 전 직원 노고를 치하한다는 검찰총장의 뜻을 가감없이 전하며 그들을 위로했다. 검찰이 부당한 정치적 공세에 굴하지 않고 의연한 자세로 본분을 지켜 떳떳하게 사건을 처리하였던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 33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광주지방검찰청 유순석 검사장, 심상명 차장검사, 김각영 형사 제1부장 및 정충수 공안부장과 소속 검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다.



<정리=박솔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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