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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회고록][전문]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1)

3부 채색(彩色) ⑪ 기획이란 용어의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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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역사 담은 법무부사 발간…법무 발전 장기계획도 수립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어느 날의 청와대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1987. 6. 3. - 1989. 3. 28.)

 

내가 법무부 기획관리실장으로 부임하기 일주일 전쯤인 1987년 5월 26일 개각으로 정해창 대검찰청 차장검사가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하였으며, 그 다음 날 이종남 법무부차관이 검찰총장에 취임하였다. 그 일주일 뒤에 검사장급의 인사이동으로 내가 검사장의 직급으로 승진하여 법무부 기획관리실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그 인사 내용이 공표되기 직전 이종남 검찰총장으로부터 그 내용을 통보하는 축하 전화를 받았다. 정 장관께서 승진한 초임검사장 중에서 송 차장을 법무부 본부의 실장으로 특별히 발탁할 것이니 그 취지를 이해하여 장관님을 잘 보필하라는 내용과 함께 영전을 축하한다는 뜻을 전해 왔다.

 

내가 서울지방검찰정의 특수 제3부장 및 제1부장직에 있으면서 이종남 검찰총장을 검사장으로 모신 사실은 이미 그 내용이 기재되었다. 전주지검 차장검사로 전보되는 것을 섭섭히 여겨 나를 데리고 검찰총장실에 찾아가 그 연유를 물어보았던 검사장이었으므로 이종남 검찰총장께서도 내가 교통 불편한 작은 지방검찰청의 차장검사로 전보된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이번의 인사 내용이 확정된 다음 즉시 내게 축하의 뜻을 표해 주신 것으로 짐작된다.

 

이번의 인사를 단행한 정해창 법무부 장관과의 인연을 적어 둔다.

 

정 장관이 검찰과장이었던 시절, 검찰과가 검찰 제1과 내지 제4과로 확대되면서 그는 검찰 제1과장으로, 나는 검찰 제3과의 검사로 임명되어 2년 정도 함께 검찰국에 근무하였으나 소속 과가 다르니 정 장관은 어쩌면 이웃집 아저씨에 불과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나의 법무과장 시절인 1982년 6월 18일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이었던 그가 법무부 차관에 기용되어 2개월간 직속 부하로 근무한 적이 있다.

 

정 장관의 법무부 차관 재직 기간은 2년 8개월 이상이므로 내가 법무부를 떠난 후 그를 직속 상사로 모실 기회는 없었다. 그는 1985년 2월 28일 법무부 차관직에서 법무연수원장으로 전보되었다가 1986년 5월 2일 대검 차장검사가 되었다.

 

그때는 내가 전주지검의 차장검사였던 시절이었는데, 그 4일 뒤에 단행된 검찰 인사 발령에 따라 나는 부산지검의 차장검사로 전보되었으므로 내가 그 자리에서 근무하던 기간은 그의 대검 차장검사 재직 기간과 겹친다. 그리하여 부산지검 울산지청에서 수사한 형제복지원사건의 문제점과 수사 상황을 그에게 보고하게 된 것이다. 내가 기획관리실장으로 정 장관을 1년 6개월간 모신 후, 그는 법무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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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사 편찬 당시 법무부 실·국장이상 간부일동 
(왼쪽부터) 기획관리실장 송종의, 법무실장 임상현, 검찰국장 김유후, 법무부장관 정해창, 법무부차관 한영석, 교정국장 故김동철, 보호국장 故변재일, 출입국관리국장 조기현
<제공=송종의 장관>

 

내가 이런 내용을 자세히 기재해 두는 이유는 먼 훗날, 즉 30년 가까이 지난 2015년에 내가 설립한 공익법인인 천고법치문화재단에서 선정한 제1호 천고법치문화상 수상자가 정해창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인연만으로 정 장관이 수상자가 된 것은 물론 아니지만, 내가 상사로 모신 기간 그가 이룩한 업적을 나는 너무도 분명하게 보고 알았을 뿐만 아니라 퇴직 후 형사정책연구원장을 역임한 후 한국범죄방지재단을 창설하여 이 나라 국법 질서의 수호와 법치주의의 확립을 위해 남겨 놓은 뚜렷한 발자취를 그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그의 공직 경력을 참고로 적어 두는 것이다.

 

정해창 장관께서 취임 후 법무행정의 지표로 내걸었던 ‘국법 질서의 수호’가 천고법지문화재단의 창립 이념으로 계승되었으므로 이런 의미에서도 그가 나에게 준 교훈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법무행정의 목표가 이렇게 결정된 것은 나를 포함한 법무부 실·국장의 인사이동이 이루어진 후 내가 각 실국의 의견을 취합하여 그 내용을 보고한 직후 본인 스스로가 결정한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역점시책으로는 1) 자유민주체제의 수호, 2) 엄정한 사회 기강 확립, 3) 88대회 출입국 관리의 성공적 수행, 4) 법률복지기능의 지속적 추진, 5) 범죄자의 사회 내 처우 기반 확대, 6) 교정 관리의 선진화, 7) 국제법무활동의 활성화라는 일곱 가지로 정하여 법무부의 시책을 추진하였다. 장관의 복무 방침으로는 엄정, 공명, 화합이란 세 가지의 덕목이 선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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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과천청사 전경 <사진=연합뉴스>

 

 법무부 기획관리실의 연혁을 살펴본다.

 

5·16 군사혁명 이후 정부는 국가의 기본 목표 및 당면 시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국가기획제도를 창설하여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1961년 8월 25일 정부조직법을 개정하여 각 부처 장·차관의 보좌기관으로서 각 부처의 정책과 기획 수립, 심사 분석 업무 및 조정에 관한 사항을 분장하는 기획조정관을 신설하고 1960년 7월 1일 이후 그때까지 존치하던 정무·사무의 복수차관제도는 폐지하였다.

 

그 후 정부 기능의 양적 증대와 질적 다양화로 행정 기능이 점차 분권화되어 치밀한 행정 기획과 통제 강화의 필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각 부처의 기획 기능을 높이기 위하여 1962년 6월 18일 기획조정관 밑에 기획예산담당(재경서기관)과 행정관리담당(행정서기관)을 두었다.

 

신설된 기획관리실은 각종 정책과 계획의 조정, 기본 운영계획의 지침 수립, 예산 편성 및 집행 조정, 사업의 진도 파악과 심사 분석, 조직 및 정원의 관리, 직위 분류와 보수제도, 관리 개선 계획의 수립과 집행 감독, 관리 조사와 행정 통계의 유지 분석, 업무 감사, 법령안 심사, 소원 심사, 법규의 편찬 및 발간 등의 업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그 후 1970년 2월 27일 기획예산담당 및 행정관리담당이 기획예산담당관과 행정관리담당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기획조정관이란 명칭부터 따지면 나는 제14대 기획관리실장이었다. 이 부서의 첫 직명이 기획조정관이었으나 2년 뒤에 기획관리실로 개편된 후 명칭이 변경되지 않고 내려오다가 다시 그 명칭이 기획조정실로 변경되면서 조직도 개편되었다.

 

이 부서는 위에 설명한 대로 국가의 기본 목표와 당면 시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창설된 국가기획제도에 따라 정부조직법을 개정하여 행정각부에 설치된 것이므로 어느 부처 할 것 없이 가장 막중한 업무를 수행하는 부서였다.

 

정부의 행정 각부와 내각의 중앙행정기관에 기획관리실 또는 기획관리관의 명칭을 가진 부서가 그 기관의 서열 1위인 것은 이런 연혁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몇 개의 부처를 제외하면 기획관리실장은 정무직이 아닌 직업공무원의 최고직급인 1급 공무원으로 보임되어 장관을 보좌하면서 부내 각 실·국의 업무를 총괄 조정하며 업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법무부는 일반행정부처와 다른 특성이 있다. 정무직인 장관과 차관 아래에 검사, 검찰사무직, 일반행정직, 교정직, 보도직, 출입국관리직, 별정직, 기능직 등 직렬이 다른 여러 직종의 공무원이 함께 근무하는 부처로서 마치 연방공화국 같은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중앙행정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획관리실장, 법무실장, 검찰국장, 보호국장, 교정국장은 검사장 직급의 검사였고, 출국입국관리국장만은 출입국관리직이 맡고 있었다.

 

법무부의 예산 편성과 집행 조정이 정부조직법에 따라 당연히 기획관리실 소관이었으나 법무부의 연방공화국적인 성격 때문에 각 실·국의 예산 편성과 집행은 모두 그 실·국 단위로 운영되고 있었다. 법무실, 검찰, 교정, 보호 및 출입국관리국은 모두 산하기관의 업무를 총괄 조정하여야 할 형편이었으므로 검찰예산은 검찰 제1과, 교정예산은 시설과, 이런 식으로 각 실·국의 예산이 별도로 편성되어 집행되고 있었으므로 명목상 기획관리실의 통제를 받은 것일 뿐, 모두 독립공화국적인 운영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인사 관행을 소개해 둘 필요가 있다. 다른 행정부처와는 달리 기획관리실장은 부내 서열 1위의 자리일 뿐, 위와 같은 업무 특성상 검사장이 맡고 있던 법무실장, 검찰국장, 보호국장, 교정국장은 대부분 기획관리실장의 고등고시 선배였다. 사법시험 1회 출신인 내가 기획관리실장으로 부임하고 보니 법무실장은 고시 16회, 검찰국장과 보호국장은 고시 15회, 교정국장은 고시 13회 출신이었다.

 

나는 비록 사법시험 1회 합격자이긴 하였으나 시험 합격 후 대학 졸업을 위해 사법대학원에 입교하지 못하고 대학 졸업 후에 사법시험 2회 합격자들과 함께 동 대학원을 수료하였으므로 검사 임관으로 따지면 몇 년이나 앞서는 선배들이 실·국장으로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기획관리실에는 기획예산담당관과 행정관리담당관이 있을 뿐인데, 다른 실·국은 그 기구 자체가 크고, 또 많은 산하기관을 관장하는 부서였기 때문이다.

 

정부 수립 시 우리나라의 3대 국장이라 불리는 세 자리가 있었다. 내무부 치안국장, 재무부 이재국장, 법무부 형정국장이 그 직책이다. 치안국장은 이 나라 경찰의 총수이며, 이재국장은 나라의 돈줄을 쥐고 있는 자리이며, 형정국장은 수만 명의 재소자를 관리하는 직책이었으므로 국방부를 제외하고는 인원과 예산이 가장 큰 부서였다.

 

나의 기획관리실장 재임 시에도 교정국의 예산은 법무부 전체 예산의 반을 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교정국장이 법조의 가장 서열 높은 선배로 보임되어 왔다. 사정이 이러하였으므로 이 기획관리실의 직제 내용대로 각 실·국의 업무를 총괄하여 기획조정을 할 수는 없는 형편이고, 오히려 선배 실·국장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처럼 되어 버렸던 것이다.

 

정해창 장관께서 장관직을 떠나기 직전 교정국의 시설과 업무가 기획관리실로 이관되어 시설관리담당관실이 신설되었다. 이는 그럴 만한 시대적 상황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다. 이 배경과 사연은 법무부의 정사(正史)에는 한 줄도 기록될 수 없었던 내용이므로 여기에 그 내용을 적어 둔다.

 

이 교정국 시설과는 사법시설조성법과 사법시설특별회계법에 따라 법무부에 책정된 사법시설특별회계의 예산을 집행하는 주무과였다. 이렇게 된 사정은 법무부 산하기관 중 검찰청보다도 교정시설이 더 크고 방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산 자체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법무부의 산하기관이 본부 직할 법무연수원, 검찰국이 관장하는 각급 검찰청, 보호국 산하의 보호관찰소 및 치료감호소, 교정국 산하의 전국 교도소와 소년원, 출입국 산하의 각 출입국관리사무소이니 이 모든 기관에 관한 사법시설예산을 기획관리실에서 통합적으로 관장하며 조정·집행함이 직제상으로는 당연하였으나, 법무부의 특성상 수십 년간 이 예산을 교정국 시설과가 담당하여 집행해왔던 것이다.

 

법무부 본부 자체가 이런 문제점을 안고 있었으므로 후술하는 법무선진화 제1차 5개년 계획의 검토 대상이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다가는 교정국에서 큰 불만을 제기할 것임이 분명하고, 더구나 교정국장은 부내의 최고참 선배였으므로 평지풍파를 일으킬 우려가 있어서 이 문제만은 위 계획 수립 이전에 내가 별도로 장관께 보고한 바 있었다.

 

장관께서야 법무행정의 달인이라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로 법무행정의 모든 분야를 꿰뚫고 있었던 법무행정의 도사였으니 법무부 조직상의 이런 문제를 소상히 알고 계셨다. 1988년 초에 장관의 내락을 받은 후 즉시 기획단에 지시하여 이를 위 5개년 계획에 포함시키되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면서 추진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예기치 않게 발생된 교정사고로 인하여 별도로 급속히 추진되어 그 5개년 계획과 상관없이 조기에 결말을 보게 되었다.

 

1988년 10월 8일 교도소에서 호송하던 죄수 25명 중 12명이 탈주하는 큰 사고가 있었다. 그중 2명만 즉시 체포하였을 뿐, 나머지 탈주범의 검거에 많은 시일이 소요되어 큰 파문이 일어났다. 이 사고로 인하여 그 이틀 후 법무부 장관의 대국민 사과문 발표까지 있었다.


이 일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달 20일 한겨레신문에 서울구치소의 비위 사실이 특종기사로 보도되었다. 이 구치소에 호화 집기로 가득 찬 법무부 장관의 집무실이 있다는 내용의 보도였다. 법무부에서 즉시 진상을 조사한 결과, 보도 내용에 다소 과장된 내용이 있긴 하였으나 서울구치소 건물에 법무부 장관의 집무실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교정 당국자만 알고 있었던 내용이니 법무부 장관이 대로하였음은 불문가지이다. 도대체 장관이 서울구치소에 들어가 그 건물에서 집무할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법시설 특별회계의 예산을 교정국 시설과에서 집행하다 보니 이런 엉뚱한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진상이 파악된 직후 법무부 장관의 엄중한 지시가 내게 하달되었다. 내가 이미 보고했던 내용대로 기획관리실에 시설담당관을 신설하여 교정국 시설과에서 취급하던 사법시설 특별회계예산에 관한 모든 업무를 이관하고, 이를 처리할 수 있는 인원을 배정하여 법무부직제를 즉시 개정하라는 내용의 지시였다. 이 직제개정이 전광석화처럼 추진되어 그 1개월 뒤인 1988년 11월 24일 개정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됨으로써 법무부 기획관리실에 시설담당관직이 신설되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내게 보관된 기획관리실장 시절의 업무 일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업무 일지는 3권인데, 거의 빈칸이 없을 정도로 기획관리실의 복잡다단한 당시의 모든 업무 처리 내용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보면 내가 법무부에 부임하던 해인 1987년 연말에 제13대 대통령선거가, 그 이듬해에 제12대 대통령의 퇴임과 제13대 대통령의 취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뒤이어 제13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이 실시될 예정이고, 여름에 88하계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되도록 확정된 상태였으므로 범정부적으로 이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야 할 형편이었다.


이처럼 기획관리실의 통상적 업무 이외에 즉시 신속하게 대처해야 할 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었으므로 내 업무 일지조차 깨알 같은 글자로 거의 몇 권의 책이라고 해야 할 많은 내용의 업무 추진 상황이 기록된 것이다.


오늘날의 법무부직제를 보니 기획조정실의 업무로 명시된 18개 사항 중 비상계획관의 담당 업무인 두 개의 사항을 제외한 모든 업무가 당시 기획관리실의 업무였으나, 이 모든 업무를 처리할 부서는 오직 두 개 담당관실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 기획관리실에는 한 명의 검사도 배속되어 있지 않았다.


시급히 처리하여야 할 중요 사안마다 다른 실·국 소속 검사를 차출하여 임시로 TF(당시는 기획단이라 불렀다)를 구성하여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선배 실·국장들을 찾아가 하소연하며 검사를 지원받아 기획단을 구성하여 수시로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처지였다.


내가 기획관리실장으로 부임하여 장관에게 부임 신고를 한 다음 날인 1987년 6월 9일에 있었던 일이다. 기획관리실의 업무 현황을 파악하지 못하였음은 물론, 기획관리실의 업무 계획조차 장관에게 보고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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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발간된 법무부사 <제공=송종의 장관>


장관의 특명이었다. 즉시 『법무부사』의 편찬 계획을 수립하여 조속히 이 책을 발간하라는 취지의 직무 명령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40년간에 걸친 법무부의 역사를 1권의 책으로 만들라는 지시였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고, 또 이 업무는 물론 기획관리실장의 주관으로 추진해야 할 내용임은 분명하다. 장관께서는 나보다 일주일 먼저 장관직에 취임하였으므로 그동안 이 일을 이미 구상해 두었던 것 같다. 장관께서는 나의 전임 실장과 각 국장에게 이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인원을 미리 선정해 두라는 지시가 있었던 모양이다.


장관의 이런 특명에 따라 즉시 법무부사 편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법무부차관 한영석을 편찬위원장으로, 법무부의 각 실·국장인 기획관리실장 송종의, 법무실장 임상현, 검찰국장 김유후, 보호국장 변재일, 교정국장 김동철, 출입국관리국장 조기현 등 6명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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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위원으로 5명이 선정되었다. 집필 위원장은 보호국 관찰과장 이범관 검사이고, 법무실 검찰관 이훈규, 검찰국 검찰관 정진섭, 교정국 교정관 정동진, 출입국관리국 출입국사무관 최수근 등 4명이 집필 위원이었다.


이 『법무부사』는 이런 경위로 일이 추진되어 정해창 장관께서 제37대 법무부 장관직에서 퇴임하기 한 달 전인 1988년 2월 15일 드디어 법무부의 모든 역사를 이 한 권의 책에 수록하여 발간되었다. 8개월이 넘는 기간을 거치면서 수십 차례의 회의를 진행하며 위 집필 위원들이 이 일에만 매달려 이루어 낸 실로 보람찬 결실이었다. 이 『법무부사』는 당시의 예산 사정으로 인하여 많은 부수를 인쇄할 수 없었으므로 이 실무 작업을 총괄하였던 나조차 단 한 권도 개인적으로 소장할 수 없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법무부 운영지원과장에게 부탁하여 법무부의 도서실에 소장되어 있던 이 귀중한 책의 대출을 부탁하여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확인한 후 다시 법무부에 반환하였다. 타블로이드판으로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내용이 담겨 법무부 40년의 역사가 공화국별로 편찬된 이 귀중한 책자를 살펴보니 실로 감회가 깊었다.


1988년 2월 15일자로 작성되어 이 책의 첫머리에 실린 발간사를 집필하였던 제37대 정해창 법무부 장관께서는 나보다 훨씬 진한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이 『법무부사』가 발간되기 이전은 물론, 그 당시에도 업무의 전산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때였다. 이 『법무부사』 집필의 기초 자료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못하였음은 당연하므로 각 실·국의 각 과에서 중구난방으로 자료를 관리해 오던 실정이었다. 이 기본 자료의 수집 자체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체계적으로 자료가 보존되지 못하였으니 멸실되었거나 알 수 없는 내용이 오죽 많았겠는가? 수십 차례의 협조 공문이 발송되어야 했으며, 해당 각과의 주무관들에게 기획관리실장과 편찬위원들의 성화같은 재촉과 빗발치는 독촉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법무부사』의 발간 사업은 미리 예산이 책정되어 있는 소위 예산사업이 아니었다. 내가 부임하던 해인 1987년도의 예산에 반영되어 있었을 턱이 없고, 1988년에 이 책자의 발간 예산으로는 1,000만 원 정도만이 가용예산이었으나 이 책자의 발간에는 3,000만 원이 넘는 예산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부족한 예산은 기획관리실장이 각 실·국의 예산 내용을 파악하여 충당할 책임이 있는 것이므로 국세청장이 마치 국세를 부과하듯 각 실·국의 재산 상태(?)에 따라 그 부족액을 마련하도록 조치하였을 것임은 분명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집대성된 이 한 권의 책 『법무부사』는 가히 법무부가 이루어 낸 가장 자랑스러운 법무부의 문화유산이다. 뒷날 우리의 법무부 후배들이 다시는 이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이 『법무부사』가 발간된 이후에는 매년 법무연감을 정례적으로 발간하는 방침이 확정되었으므로 보다 상세한 내용과 자료가 들어 있는 법무연감이 매년 발간되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 기회에 뒤늦게나마 이 어려운 작업을 마무리한 집필위원장 이범관 검사를 비롯한 집필 위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다.


나의 재임 중 이루어진 또 한 가지 의미 있는 일의 추진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다. 위 『법무부사』의 편찬 작업이 시작된 지 두어 달 지난 어느 날이었다. 당시 법무부의 실·국장들은 특별한 오찬 계획이 없는 한 과천종합청사 별관의 구내식당에서 장·차관을 모시고 점심 식사를 하는 것이 통례였다.


식사를 끝내고 법무부 청사로 함께 걸어가던 도중 정 장관께서 내게 다가오시더니 “송 실장!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듯이 우리 법무부도 이런 장기발전계획을 수립하여야 하지 않겠소?”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런 장기발전계획이 마련되어 있으면 참 좋겠지요.”라고 간단히 답했다. 장관께서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이라 여겨 이렇게 간단히 대답하고 말았다.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 으레 하던 대로 또 점심 식사를 마치고 법무부 청사로 걸어가던 도중 장관께서 내게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저번에 우리가 얘기했던 법무부의 장기발전계획은 잘 추진되고 있소?” 나는 무슨 몽둥이로 뒤통수를 크게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대답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 장관께서 부하들에게 일을 시키는 방법은 이런 경우가 많았다.


사무실에 돌아와 머리를 싸매고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이 일을 추진할 TF의 구성안을 마련하여 그 구성원이 될 후보자 몇 명을 골라 놓고 장관실을 찾았다. 내 손에는 기획단 구성을 위한 기본계획에 대한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그 보고를 받은 장관께서 내 의견대로 일을 추진해 보라는 지시가 있었다. 즉시 이 기획단 구성에 관한 내부 공문이 차관실을 거쳐 장관의 결재가 이루어진 것임은 당연하다.


당시 이 내부 결재 문서에 명시된 기획단의 단장은 검찰 제4과장 윤동민, 법무실의 박종록 검사, 보호국의 주성원 검사였다. 법무부의 장기발전계획을 수립한다는 이 막중한 업무는 검사들의 두뇌를 빌려야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검사들이 소속된 법무실, 검찰국, 보호국에서 각 1명씩이 뽑혀 3명을 구성원으로 TF를 발족하게 된 것이다.


최초의 기획단 구성에 관한 내부 결재의 문서에는 위 3명만이 그 구성원으로 명시되어 있으나 이 기획단이 발족하면서부터 단장인 검찰 제4과장 윤동민 검사는 검찰 제4과 소속 말석 검사였던 박한철 검사를 이 기획단에 참여시킨 후 그때로부터 장장 8개월 걸쳐 진행된 이 발전계획수립의 실무를 맡겨 일을 처리하였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위 4명의 검사가 이 업무에 매달려 그 결실을 보았다.


이 기념비적 사업에 시종 참여한 박한철 검사의 이름을 법무부의 역사로 남겨 두기 위해 이 기획단이 해체되기 전인 1988년 3월 8일, 나는 기획단 구성의 인적 사항을 수정한 내부결재 공문을 만들어 장관의 결재를 받아 법무부에 남겨 두었다. 그럴 필요가 있었던 역사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획단에서 추진하였던 법무부의 장기발전계획은 제1차 5개년 계획과 제2차 5개년 계획 두 가지로 이루어진 것이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한영석 법무부 차관 재직 시에 결말을 보았고, 제2차 5개년 계획은 후임인 서정신 차관 재직 시에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 두 계획 모두 정해창 장관의 재임 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계획은 말 그대로 10년 앞을 내다보는 장기발전계획이었으므로 법무부 본부와 각 실·국 산하기관의 조직 개편, 기구 신설, 인원 보완, 교육 내용 및 예산 대책과 그 집행의 우선순위 등 그야말로 필요한 모든 사항을 망라하는 방대한 내용의 장기발전계획이었다. 차관을 모시고 수십 회의 독회가 진행되어야 했으며, 장관이 직접 주재한 독회를 열어 지적된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그 지시를 담아 수십 차례의 수정을 거쳐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던 계획이었다.


이 내용을 내가 지금 다 기억할 수는 없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이 내용 중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될 내용도 많았으므로 유인물로 남겨진 이 발전계획 중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내용도 많다. 그 어느 한 가지라도 기사화되면 파문을 일으킬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존폐와 서울지방검찰청의 조직 개편 등 시사성이 있는 민감한 문제가 그런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내부적으로 각 실·국에 전파된 유인물에는 이런 부분이 제외되어 있으므로 그것과 내부 결재를 받아 최종적으로 법무부에 보존된 내용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교정국서 사법시설 특별회계 집행으로
“구치소에 장관 집무실” 엉뚱한 보도 파문
장관 특명으로 법무부 직제 개편 착수
기획관리실에 시설담당관 신설해 이관
‘법무부사’ 편찬…법무부 40년 역사 정리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하듯
법무부도 장기 발전계획 수립했으면
장관의 의중 뒤늦게 알고 나서 서둘러
급하게 TF팀 구성…장관 재임 중 마무리
팀원들 야식비로 장관 판공비 거덜 내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 법무부가 이 계획 내용대로 발전되면서 기구 개편, 기관의 증설, 인원의 증원과 이에 필요한 예산의 확보가 차질 없이 추진되었는지의 여부는 내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계획이 법무부가 걸어 나갈 앞길의 확실하고도 분명한 이정표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 기획단에서는 위의 기본적 계획 이외에 그때까지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각국의 형사사법제도』, 『각국의 경찰제도』라는 두 권의 책자까지 만들어 배포했다. 앞으로 재연될지 알 수 없는 경찰의 수사권 독립 움직임에 검찰이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이런 책자까지 만들어 배포하면서 검사들에게는 물론, 대외적으로도 외국의 법제를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 이런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런 방대한 내용의 작업이었기에 여기에도 상당한 예산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이 작업을 뒷받침할 예산이 마땅치 않았다. 이 문제 역시 기획관리실장이 해결해야 할 내용이었으므로 『법무부사』의 편찬에 소요되는 예산의 염출 방법 이외에 별도의 조치가 필요한 실정이었다.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과 달리 수사정보비 같은 예산을 쓸 수 없는 직책이므로 실제로 이런 일을 추진하는 부하들에게 생색내는 돈을 줄 수 없는 벼슬이다. 그러나 『법무부사』의 편찬과 법무 발전계획의 수립이라는 두 큰 과제가 거의 맞물려 추진되고 있었으므로 야근을 밥 먹듯 하는 부하들에게 밥값이라도 주면서 격려해야 할 필요가 절실했다.


내가 시도 때도 없이 장관실을 드나들면서 봉투를 달라고 했으니, 장관께서는 나를 고약한 빚쟁이처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 청을 거절한 바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장관실의 판공비 현황을 파악해 보았더니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을 알게 되었다. “네가 달라고 하면 준다. 그러나 없으면 못 주니 돈을 받아 가려거든 네가 알아서 해라.” 이런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선배 실·국장들에게 이런 딱한 사정을 낱낱이 고하여 긴급 대책을 마련한 후 산하기관의 예산을 끌어다 쓰는 방법까지 동원하면서 겨우 이 어려운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결국 그 돈은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실·국 소속 직원들의 야근비와 격려금으로 사용될 것이므로 나의 요청을 거절할 명분도 없었을 것이다.


위 기획단에서는 이 일만을 처리한 것이 아니다. 1988년 12월 16일 대통령선거로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업무 보고, 퇴임이 예정된 전두한 대통령에 대한 업무 실적 보고, 연초에 시행되는 대통령에 대한 신년 업무 보고, 새로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업무 계획 보고 등 크고 작은 모든 보고서가 이 검사들의 손으로 이 기획단에서 작성된 것이다.


이 기획단의 단장이었던 윤동민 검사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그 어려운 일을 처리하면서도 늘 재치 있는 말로 부하 검사들을 웃기며 배꼽을 쥐게 했던 그 모습을 이제는 영영 찾아볼 수 없다. 하늘이 무심한 것 같아 하늘을 쳐다보며 그의 명복을 빌 뿐이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위 기획단 소속 검사 한 사람과 통화한 적이 있다. 이런 일이 법무행정의 전반을 알 수 있는 잊지 못할 추억이긴 하였으나 다시 그런 일을 하라면 죽어도 못할 일이었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소회였다. 윤동민 검사를 단장으로 이 어려운 일을 처리하였던 세 분 검사의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하는 바이다.


나의 기획관리실장 재임 중 법무 검찰의 수뇌급 인사이동 내용을 참고로 적어 둔다. 1988년 3월 5일 당시의 한영석 법무부 차관이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부산지방검찰청의 검사장이던 서정신 씨가 그의 후임 법무부 차관으로 기용되었다. 그해에 검찰청법이 이미 개정되어 임기 2년의 검찰총장 임기제가 시행될 예정이었다.


제5공화국 말기인 1988년 12월 5일자의 대폭적인 개각에 따라 정해창 장관의 후임으로 재야의 법조인이었던 고시 2회 출신의 허형구 전 검찰총장이 제38대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되면서 김기춘 법무연수원장이 최초의 임기제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약 4개월 뒤인 1989년 3월 29일자로 단행된 검사장급 인사이동에 따라 나는 대검찰청 형사 제2부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그 인사이동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허형구 장관과의 인연은 이번 법무부 근무가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내가 검찰 제3과의 검사로 근무하던 중 허 장관이 서정각 검찰국장의 후임으로 부임한 일이고, 두 번째는 내가 서울지방검찰청의 평검사로 근무하던 중 그가 검사장으로 부임함으로써 나의 직속 상사가 되었고, 나의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재임 중 그가 법무부 장관에 취임하였으니 이것이 세 번째의 인연이었다.


검사장급 인사이동이 단행된 것이 1989년 3월 29일이었으므로 아마 그 며칠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허 장관께서 부르시기에 장관실에 들어가니 나의 신상 변동에 관하여 장관께서는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씀하셨다.


내가 송 실장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므로 이번 인사에서 송 실장을 적당한 일선 지방검찰청의 검사장으로 내정하고, 검사장급 인사 예정 내용을 김기춘 검찰총장께 통보하였더니,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는 장관께서 구상하신 내용대로 하시되, 송 실장만은 대검으로 보내 주시면 좋겠다는 의견을 표명하였다는 것이다. 그럼 어느 자리에 보내야 하느냐고 문의한즉, 현재 민생치안의 확립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처지이므로 그 일을 맡기려 하니 대검찰청의 형사 제2부장으로 발령해 달라는 취지였다는 것이다.


그런 인사는 본인이 섭섭하지 않겠냐고 반문한즉, 제가 잘 설득하여 데리고 있겠으니 저의 청을 수락해 달라는 의견을 표명하였다는 것이다. 검찰총장의 이런 뜻을 장관이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섭섭하더라도 대검에 가서 그의 뜻을 잘 받들어 정진하라는 취지였다. 이런 경위로 나는 법무부의 기획관리실장에서 대검찰청의 형사 제2부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내가 대검으로 부임한 다음 날 김기춘 검찰총장이 나와의 단독 오찬을 마련했다. 그 자리에서 내가 검찰총장으로부터 들은 말은 허형구 장관께서 내게 미리 알려 준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전국 검사장 회의 끝나면 청와대서 오찬
테이블에는 대통령 문양 접시 위 담배가
애연가로 참지 못하고 한 대 피웠더니
모든 시선이 험악해져 결국 끌 수밖에
대통령 앞 검찰 간부의 최초 흡연 사건

기획관리실장은 국회 출입 단골손님
국회의원들의 ‘쪽지’ 심심치 않게 받아
모른 척하고 넘길 수 없어 처리에 고심
일선 검찰청 검사장, 차장·부장 검사에
“의원이 표 잃지 않도록 해 주라” 전달만


기획관리실장 시절 겪은 두 가지 에피소드를 적어 둔다.


첫 번째는 현직 대통령과의 ‘맞담배질 사건’이다. 1987년 11월 12일에 일어난 일이다. 내가 검사장으로 승진되어 기획관리실장으로 발령된 그해였다. 그날 오전 전국 검사장 회의가 있었다. 이런 검사장 회의가 끝나면 청와대에서 법무·검찰의 관계관들을 소집하여 오찬 자리를 마련해 주던 관행이 있었던 때이다.


그날 오전 검사장 회의를 끝낸 후 법무 검찰의 관계관 수십 명이 청와대에 들어가 이미 마련된 오찬장에 자리를 잡았다. 정확한 숫자는 기억에 없으나 법무부의 장·차관과 실·국장, 대검찰청의 검찰총장, 차장검사를 비롯한 각 부장과 전국 검찰청의 검사장들이 모두 그 자리에 참석하였으니 30여 명의 관계관이 상석인 대통령을 가운데로 좌우에 열석하여 자리를 잡았다. 내 직책이 기획관리실장으로 법무부의 서열 3위였으므로 대통령의 우측으로 길게 놓인 세 번째 자리에 내가 앉아 있었을 것이다.


자리에 앉아 보니 찻잔이 놓여 있고, 그 옆의 대통령 문양이 들어 있는 접시 위에 담배와 성냥 한 갑씩이 놓여 있었다. 그 담배는 5개비가 들어가도록 특별한 규격으로 만든 담배였는데, 역시 대통령의 문양이 그려져 제작된 것이었다. 당시의 대통령이 애연가였으므로 물론 그의 테이블 위에도 이 담배와 성냥이 놓여 있었다.


장관의 인사 말씀과 검사장 회의의 결과 보고에 이어 대통령의 지시가 있은 다음 오찬이 시작되기 전 잠시의 환담이 오고 갔다. 나는 당시 애연가였으므로 그 담배에 자꾸 눈길이 끌려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한번 피워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에 그 담뱃갑을 열어 1개비의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소리도 요란하게 성냥을 켜서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장내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시선도 내게 꽂힌 것은 당연하다. 눈치를 보니 이게 심상치 않은 일이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금방 담배를 꺼 버릴 형편도 아니었으므로 몇 모금 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니 나를 쳐다보는 모든 시선이 점점 험악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부득이 담뱃불을 끌 수밖에 없었다.


이 담배는 손님 대접이라는 형식상 그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일 뿐, 대통령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실제로 담배를 피운 사람도 없다는 것을 사후에 알게 되었다. 초임검사장으로서 청와대에 처음 들어갔던 내가 그런 사정을 알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 일은 검찰에서 한동안 회자되었던 담배 사건이다.


흡연자를 범죄자처럼 여기고 있는 요즈음은 전혀 재연될 가능성이 없는 일이겠으나 손님 접대용 테이블에 주인이 놓아 둔 담배는 피우라고 준비했다는 것이 당시의 내 생각이었다. 이 오찬 행사가 끝난 후 행사장을 나오면서 ‘천하의 골초’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Y 검사장이 내게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심지어 천하의 골초인 내가 담배를 피우지 못했던 곳에서 네가 담배를 피웠으니 내 별명을 이제는 네가 가지고 가라.”


선배 검사장들에게 확인한 결과, 제5공화국 시절 법무·검찰의 간부가 대통령 앞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인 사건은 없었다니 이것이 최초의 흡연 사건인 것만은 분명했고, 이 사건 이후 청와대에서 담배를 준비하지 않았는지, 내가 용기가 없었던지, 다시 흡연 사건이 발생되지 않았으니 최후의 사건인 것 또한 분명하다.
두 번째는 국회의원의 소위 ‘쪽지’에 얽힌 사연이다.


중앙행정기관인 행정 각부의 기획관리실장은 국회의 단골손님이다. 정기국회는 물론 임시국회의 본회의와 법제사법위원회 및 예산결산심의위원회에 반드시 참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집권당과의 당정 협의와 당정 정책조정회의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진행되는 국회의 행사에 장관을 수행하여 반드시 참석하는 사람이 기획관리실장이다.


이런 사정이므로 직무상 여러 국회의원을 보게 되는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위원 중에는 법조인이 많이 있으므로 이들로부터 심심치 않게 ‘쪽지’를 받게 되는 것이다. 직무상 이를 모른 척하고 넘길 수도 없어서 그 처리가 쉽지 않았다. 일선 검찰청의 검사장, 차장검사 또는 부장검사, 때로는 주임 검사에게 그 뜻을 전해야 했기에 궁리 끝에 내 나름의 원칙을 세웠다.


국회의원들은 개인적 부탁도 있을 수 있으나 지역구 유권자들의 청탁에 따라 부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소위 ‘표’를 잃지 않도록 배려해 주면 되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의 쪽지는 무리하거나 안 될 일을 부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그 청탁 내용을 들어줄 수 없더라도 국회의원에게 줄을 댄 사건관계자들에게 국회의원이 각별히 이 사건에 대한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검찰에 청탁했다는 사실만을 그들에게 일러 주면 최소한 ‘표’는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건 담당 검사가 번거롭기는 하나 이 뜻을 이해하여 그 국회의원이 생색을 낼 수 있도록 해 주라는 것이 내가 일선 검찰청에 내려보낸 사건 청탁의 내용이었다.


일을 이렇게 처리하다 보니 내게 건네주는 쪽지의 숫자도 심심치 않게 늘어 갔다. 그러나 나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일선 검찰청에 위와 같은 취지를 전해 주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으니 말만 그럴듯하게 해서 국회의원이 표를 잃지 않도록 해 주라는 똑같은 내용의 부탁이 전달되었을 것이다.


국회의원이 나로부터 돈을 받을 일은 혹시 있을지 모르나 내가 국회의원으로부터 돈 받을 일은 발생될 가능성이 전혀 없으니, 말만 가지고서야 무슨 죄가 될 리 있겠는가? 일선 검찰청의 수사 검사들을 번거롭게 만든 것만이 미안한 일로 기억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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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기획관리실장의 재직기념패가 내게 있으나 ‘법무부 기획관리실 직원 일동’이라고만 표시되어 있으므로 그 명단을 여기에 적지 못한다. 다만, 직제개정 전의 기획예산담당관은 이기만, 행정관리담당관은 성길용 이었음을 밝히며 두 분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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