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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만나는 법

[시인이 만나는 법] 탈북민 출신 1호 변호사 이영현

“한국 사회 진영 간 갈등 너무 심해…좌우 양쪽 날개 가지고 세상 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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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가적 판단으로 볼 때 탈북 어민의 강제북송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법적 절차도 무시한 채 국민을 강제추방하여 죽음으로 내몬, 법치국가에서 있어서는 안 될 위헌, 위법적 사건입니다. 우리 헌법 제3조에 따르면 북한주민도 당연히 대한민국 국민이거든요. 이는 우리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판례에 따라 확립된 것이기도 합니다. 헌법이나 법률 그 어디에도 국민을 외국으로 강제추방하도록 규정하고 있지 않아요. 나아가 헌법 제10조는 국가에 국민의 보호의무를 명시하고 있어요. 그런데 국가가 대한민국 국민인 탈북어민을 사지로 강제 추방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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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력]

연세대 법대, 경북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2019년 제8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1997년 대규모의 아사자가 발생한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을 탈출해, 중국을 거쳐 2002년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국내 정규교육과정을 받고 북한이탈주민 가운데 첫 변호사가 됐다.
대한변호사협회 북한인권특별위원회·북한이탈주민법률지원위원회 위원, 통일부 하나원 정책자문단 위원 등을 맡고 있으며 현재 법무법인 세창에서 근무 중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있었던 탈북어민 북송 사건과 관련해 최근 사진과 영상 같은 자료가 공개돼 정치 이슈가 된 적 있다. 탈북민 최초로 한국에서 변호사 라이선스를 갖게 된 이영현 변호사(39·변호사시험 8회)를 만나기로 했을 때, 이 사안에 대한 입장을 묻는 것은 그래서 불가피한 일이었다. 북송의 위법성과 위헌성을 말하는 이 변호사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내용은 논리적이었다. 그에게 다시, 관련 법령을 적용해서 아무 문제없는 결정이었다는 문재인 정부의 발표는 그럼 무엇이냐고 물었다.

 

“문재인 정부는 탈북 어민의 강제송환의 근거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과 귀순의 진정성 의심을 들고 있어요. 그런데 이 법은 어디까지나 북한이탈주민이 법에 따라 보호대상으로 결정된 경우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고 정착하면서 살아가도록 지원하기 위해 제정된 특별법일 뿐 강제 송환의 근거법은 아니에요. 설령 탈북 어민들이 살인 같은 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이 법에 따른 보호대상자가 되지 못하는 것뿐이지, 강제송환의 논거로 삼는 것은 이 법을 임의적,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탈북 어민들은 문서로 이미 귀순의사를 밝혔고, 또한 판문점에서 북으로 가지 않으려고 자해까지 하면서 몸부림치는 사진을 봐도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의사가 명백하다고 할 것입니다.”

탈북민 정착·법률적 지원에 최대 노력
북에 있는 어머니·형제 소식 전혀 몰라
외롭고 고독한 순간 펑펑 울며 기도해
따뜻한 울타리 되어준 분들에게 감사
 


이영현 변호사가 2019년 4전5기만에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기까지, 그의 골육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서사의 디테일은 드라마작가나 영화제작자라면 탐내도 좋을 극적인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그는 1997년 수많은 주민이 굶주림에 목숨을 잃던 ‘고난의 행군’ 시절, 만 14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에 가서 쌀 한 배낭이라도 메고 와 가족을 살리자는 외삼촌의 말에 따라 두만강을 건넌다(그 과정에서 정작 외삼촌은 급류에 휩쓸려 실종된다). 이후 천신만고 끝에 길림성 훈춘시에 도착해 한족과 조선족의 집에 기식하며 살다가 한 선교사의 도움으로 허베이성으로 이주, 조선족 부부의 집에 살면서 막노동으로 생계와 학업을 이어가며 한국행을 모색하던 중 2002년 5월 한국에 들어온다.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조사를 받고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에 입소해 탈북민 정착 교육을 받은 그는 열아홉의 나이에 부산에 소재한 고등학교에 입학, 한국의 정규 교육 과정을 밟기 시작해 연세대 법학과와 경북대 로스쿨에서 공부한 후 변호사의 꿈을 이룬다. 실로 영화 같은 이야기 아닌가.

올 2월부터 법무법인 세창 대표인 김현 변호사의 제안으로 함께 일하게 된 그를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나는 아닌 게 아니라 법무법인처럼 꾸민 영화세트장에서 탈북민 출신 변호사역을 맡은 배우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그가 쓴 드라마가 다큐멘터리로 체감되기까지 다소간 시간이 걸렸다. 그의 말투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북한 억양의 흔적도, 그렇다고 그가 학업을 한 경상도 억양도 없었다. 그는 지극히 안정적인 표준 억양을 구사했는데, 그것에서 나는 또 그가 얼마나 자연적 존재로서의 보편을 갈망했는지를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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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변호사는 함경도 동해안에 인접한 시골 마을 출신이라고 했다(보안을 위해 구체적 지명은 밝히지 않았다). 그는 참 드물게 행복했던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고향 마을은 뒤에는 산이 자리하고 있고, 앞으로는 넓은 동해바다와 아름다운 백사장이 펼쳐지는 바닷가 마을입니다. 여름이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러 찾아오는 명소이기도 합니다. 저도 유년시절, 거의 매일 친구들과 해변가로 달려가 조개를 잡아 모닥불에 구워 먹고, 백사장에서 하루 종일 뒹굴며 모래성을 쌓았다가 허물기를 반복했어요. 그 시간들이 북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 같습니다.”

그가 우리 학제대로라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에 고등학교 과정을 밟기 시작한 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자신과 같은 탈북민을 법률적으로 돕고 나아가 북한주민의 인권보호를 위한 뜻을 펼치겠다는 확고한 의지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지금 대한변호사협회 북한인권특별위원회와 북한이탈주민법률지원위원회 등에 소속되어 북한인권과 탈북민들의 성공적인 남한 정착을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매달 정기적인 위원회에 참석하고 각종 세미나와 연구 모임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단다. 일반 변호사처럼 민·형사 사건을 모두 진행하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겐 이런 의심과 우려가 생겼다. 자신이 탈북민 출신이라는 신분적 지표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지나치게 탈북민 지원과 북한인권 문제에 매달리다 보면 이념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지 않겠냐고. 불편할 수도 있는 질문을 그는 이렇게 받아쳤다.

“네, 저도 그 부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요. 그래서 첨예한 현실정치에는 일절 개입하거나 발언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편향되는 것과 극단화 되는 것이 현재 한국 사회가 안고 있고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숙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공동체의 건강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좌우 양쪽 날개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데, 한국 사회는 진영 간 갈등이 너무 심한 게 사실이에요. 저는 진영이나 이념에 입각해 있지 않고 오로지 생명과 인권이라는 보편적이고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를 보수다, 특정 정당 편이다라고 보는 시각에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에겐 심장에 그어진 흉터 같은 것일 텐데, 그는 북한을 탈출할 당시 가족을 북에 두고 왔다. 그렇게 헤어진 가족과 연락이 닿는지를 조심스레 물었다. 연락이 닿는다는 대답을 기대하면서.

“탈북민 중에서는 브로커를 통해서 북측에 남겨진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요. 심지어는 전화통화도 하구요. 저도 몇 차례 연락을 시도해봤는데 잘 안 됐고 그래서 가족의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어쩔 수 없이 침울해졌는데, 이쯤에서 내가 사전에 그에게 건넨 질문지 파일에는 일부러 넣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한국 사회는 인정하기 싫어도 연고 중심 사회다. 혈연과 학연으로, 지연으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상부상조하면서 치열하게 도생하는 게 한국 사회다. 상처받아 위로를 받고 싶을 때 전화라도 걸 수 있는 가족이나 초등학교 동창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이영현 변호사는 혈혈단신 한국에 왔다. 사고무친, 고립무원의 세계에 홀로 던져진 것. 상상하기 힘든 인고와 각별한 의지를 통해 그가 자신의 삶을 사지에서 끌고 온 곳이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정글이었던 것. 이런 곳에서 그가 아무도 몰래 견뎠을 공포와 고독의 양상이 궁금했다.

“한국에 와서 공포스럽고 고독했던 순간이 왜 없었겠어요. 그럴 때마다 사실은 펑펑 울었습니다. 책을 보다가도 울고 공부를 하다가도 울고, 그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새벽기도를 다니면서도 펑펑 울었어요. 그렇게 기도하고 저 자신과 대화하면서 어느 사이 저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습니다.”

그의 눈망울이 좀 젖어드는가 싶었는데, 그는 그래도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주신 고마운 분들이 많았다면서 그분들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했다.

중국에서부터 아버지가 되어주었다는 은춘표 선교사님, 부산의 고등학교에서 가르침을 베풀어준 신기영, 이지수 선생님, 대학교에서 은사로 모신 김정주 교수님, 정종훈 교수님, 김민서 교수님. 그리고 정성진 목사님. (이영현 변호사가 당신들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 변호사는 현행 북한이탈주민을 지원하는 법제에서 개정되었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탈북을 감행한 이후 중국이나 몽골 등 제3국에 장기간 머물면서 그곳에서 자녀를 낳은 탈북민들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바로 그 자녀에게 탈북민의 지위나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듣고 보니 탈북 이후 한국에 들어오기까지의 시간이 점점 장기화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현행 법령은 마땅히 어울리지 않는 게 사실 같았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분위기 전환을 위해 그에게 좀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한국에 와서 먹어본 평양냉면 맛이 어떠했느냐고. 품평을 좀 해주면 좋겠다고.

“북에 있을 때도 냉면을 자주 먹지는 못했고 맛을 잘 모르는데요. 솔직히 서울에서 먹어본 평양냉면에서 별 맛을 못 느꼈어요. 그저 슴슴했고요. 맛을 잘 모르겠더라구요.”

나는 곧 통절한 고통을 가슴속에서 오래도록 삭혀온 이에게 음식맛을 논평해달라고 한 내 가벼움을 반성했다. 나는 그의 대답을 듣고서야 알았던 거다. 고향 음식에 대한 미각을 그는 미필적 고의에 의해 상실한 것이라고. 고향과 함께 따라오는 저 농밀한 슬픔을 희석시키려는 그의 무의식이 그의 미각의 세계에 그런 명령을 내렸다는 걸.

이 변호사는 유년 시절 뛰어놀던 햇살 가득한 바닷가로 반드시 돌아갈 거라고 했다. 그의 시선은 이미 그 푸른 바닷빛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김도언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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