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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회고록][전문]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0)

2부 가필(加筆) ⑩ 화기만당(和氣滿堂)의 검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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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지도자는 화목한 직장을 만든다


부산지방검찰청 제1차장검사

(1986. 5. 6. ~ 1987. 6. 2.)

 

 

당시 부산지방검찰청의 청사는 부산의 구도심지인 부민동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2층 구조의 웅장한 건물이었다. 정부 수립 후 경남도청의 청사로 사용되다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을 가는 바람에 한동안 정부종합청사였던 건물이다. 그 건물의 2층 북서쪽 모서리에 제1차장 검사실이 있었고, 그 방에 이어 남쪽으로 제2차장의 검사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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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당시에는 부산지방법원 및 검찰청으로 쓰였던 옛 경남도청 건물 
<사진제공=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나와 같은 날짜로 같은 청의 차장검사로 부임한 사람은 13년 전에 서울지방검찰청 성동지청에서 평검사로 함께 근무하였던 문종수(文鐘洙) 검사였다. 문 검사에 대하여 내가 평소 미안하게 생각하였던 사정은 성동지청 근무 시절의 기록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나는 전주지검의 차장검사직에서, 그는 인천지검의 차장검사직에서 각기 부산지검의 차장검사로 발령받아 한 청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이 인사를 주관했던 당시의 법무부 장관은 김성기(金聖基) 씨이고, 검찰총장은 서동권(徐東權) 씨였다.


김성기 장관의 전임인 K 장관은 법무부 장관직에 취임한 직후에 고등검찰관급의 직책 서열을 재정립하여 검찰의 인사 원칙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했다. 그 표본적인 인사로 서울지방검찰청 특수1부장이었던 나를 작은 검찰청의 상징인 전주지방검찰청의 차장검사로 발령했다. 그는 4개월 남짓 그 직에 있다가 물러나고, 후임 김성기 장관이 취임한 지 10개월 정도 지난 때에 이런 인사가 이루어졌다.


김성기 장관은 내가 상사로 모시고 근무한 적이 없다. 그러나 서동권 검찰총장은 내가 전주지검 차장검사로 발령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K 장관과 직접 통화한 다음 내가 전주로 발령받은 사정을 듣고, 그 내용을 내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던 분이기 때문이다. 전주지검 차장에서 영전이라고 할 만한 부산지검의 제1차장으로 전속된 것은 아마도 검찰총장의 배려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K 장관이 오래 그 직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이런 것은 이야깃거리가 될 수 없다. 우리나라 정부 수립 후 이 글을 쓰는 2015년까지 67년간 임명된 법무부 장관은 64명이다. 그러므로 법무부 장관의 평균 재직 기간은 1년 정도에 불과하다.


어떤 장관이 당찬 포부를 피력하면서 인사 원칙을 천명했다 하여 그 원칙이 반드시 그대로 지켜진다는 보장은 없다. 후임 장관이 전임 장관 시절에 이루어진 인사의 배경을 잘 알고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나마 나는 사정을 잘 아는 검찰총장이 있었던 덕분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만약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장관으로 취임하여 인사 대상자의 현재 직책만 염두에 두고 소신대로 인사를 단행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피해는 인사를 당하는 사람의 몫이다.


관직의 생리가 이러하므로 공직자 노릇 하기가 정말 힘들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팔자 탓으로 돌릴 일도 못 되니 딱한 노릇이다. K 장관의 인사 원칙이 대내외적으로 천명된 후 그 전통이 크게 바뀌지 않고 이어지는 것으로 보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차장검사 두 사람이 대학 동기생이었기는 하나, 그는 나보다 먼저 제16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으며, 나는 그 6개월 뒤에 시행된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나는 휴학하였다가 복학하여 대학 재학 중이어서 대학 졸업 후에 임관되기 위하여 사법시험 제2회 합격자들과 함께 사법대학원을 수료하였으므로 검사 임관도 그는 나보다 1년이나 빨랐다.


생년월일도 1941년 9월생으로 같았으나 그는 9월 1일이고, 나는 9월 13일이었다. 직책 서열은 내가 1차장이므로 상 서열임이 분명하나, 그는 늘 자기가 형이라고 우기는 처지였다. 이 세상에 10일 먼저 나왔다고 무슨 형님 행세를 하려 드느냐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고, 쌍둥이도 먼저 태어난 사람이 형인데, 하물며 12일이나 이 세상에 먼저 나온 사람이 형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제1차장은 총무부, 공안부, 특별수사부 3개 부와 사무국을, 제2차장은 형사 제1 내지 제4부와 공판부를 관장하는 자리였다. 소속 검사의 수만 하더라도 1차장 산하 3개 부의 검사는 몇 명 되지 않았으나, 2차장 휘하 5개 부에 소속된 검사의 수는 1차장 소속 검사 수의 두 배에 가까운 숫자였다.


경찰 등 1차 수사기관에서 송치되는 거의 모든 사건이 2차장 소속 형사부에 배당되고 있었으므로 따지고 보면 2차장은 1차장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초대부터 제21대까지의 차장검사는 1명이었으나, 제22대부터 제28대까지의 차장검사는 제1·제2차장검사의 두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우리 두 사람은 양 차장으로서는 제7대 차장검사였다.


제1차장검사는 십수 년 동안 항상 제2차장검사인 사람에게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해 온 사람이었고, 제2차장검사는 같은 기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제1차장검사 덕분에 생명을 연장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함께 지내는 동안 어떻게 살아왔을까? 형 동생 할 것 없이 정말 친형제 이상의 우의를 돈독히 하며 부산지검에 근무하였음은 불문기지다.


두 사람에게는 현격히 다른 점이 있었다. 나는 주말에 틈만 나면 등산을 하면서 명산을 누비며 명당에 자리 잡은 고찰의 대웅전을 기웃거리는 사람이었던 반면, 그는 감리교 교회를 찾아가 예배와 찬송을 하면서 주일학교의 교장 선생님(?)으로 활동하는 이외에는 별다른 취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백두대간의 소백산맥과 태백산으로부터 부산까지 이어진 태백산맥 사이에 낙동강이 흐르는 지역이 경상도이므로 이 경상도 지방에 명산이 오죽 많겠는가! 게다가 신라 시대에 이 나라의 불교문화가 찬란히 꽃피어 그 유적이 산재한 곳이 경상도였으니, 경상남도만 하더라도 가 볼 곳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었다.


내가 이곳저곳 다니면서 그를 유혹하려 하였으나, 그는 하나님을 모시는 것 이외에는 전혀 눈을 돌리려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차장검사 한 사람이 서울에 상경하는 때에는 나머지 한 사람은 관내에 있어야 했으므로 오히려 내가 부산 관내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여 고맙다고 치하하며 상경하는 처지였다.


그에게 진 빚도 갚을 겸 나는 주말에 상경하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그를 상경하도록 배려하였다. 혹시 내가 상경했다 돌아와 휴일을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보는 족족, 그는 교회에 나가 애들과 잘 지냈다는 말만 되풀이했을 뿐이다. 이 바람에 나는 관내의 명산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경승을 즐겼다.


 

1차장은 2차장에게 항상 죄지은 마음
2차장은 1차장을 ‘생명의 은인’으로
관사 입주는 2차장부터 1차장은 뒤에
출퇴근 차 운전은 1차장이 전속 기사로
지검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기만당’

 


두 차장검사가 모신 검사장은 박희태 씨
아래 사람 전적 신임하며 조직 이끌어
“송종의·문종수가 본 건 볼 필요 없다”
부속실에 쌓인 서류 모두 결재 지시
현장 목격 이후 직무수행에 더욱 만전


 

당시의 부산지방검찰청은 부산과 경상남도 전 지역을 관할하던 지방검찰청으로서 산하에 울산, 마산, 진주, 통영, 밀양, 거창 등 6개 지청이 있었다. 오늘날 울산과 마산지청이 울산지방검찰청과 창원지방검찰청으로 승격되고, 부산에 동부지청이 신설됨으로써 마산, 진주, 통영, 밀양, 거창 등 5개 지청이 창원지검 소속으로 변경되었으니 말 그대로 옛날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부산 인근만 하더라도 영남 알프스라고 불리는 큰 산줄기가 부산으로 이어지면서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이 5개씩이나 연이어 늘어서 있는 곳이므로 정말 볼만한 산이 많았다. 가지산, 천황산, 재약산, 신불산, 영축산 등이 모두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봉우리들이다. 그 산자락마다 대찰이 들어서 신라 천년의 문화재를 품고 있으니 경승이 오죽 많겠는가?


백두대간의 지리산 언저리를 가 볼 사이 없이 이 부산 부근의 산만 헤매더라도 1년으로서는 턱없이 모자라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부산에 근무하는 동안 틈틈이 이 산자락을 누비며 다녔다.


당시 부산지검에는 차장검사의 관사가 없었다. 부임하는 그해에 관사를 구입할 예산이 책정되어 내려왔으나 이곳저곳을 알아보니 그 예산으로 두 개의 관사를 매입하기에는 부족했다. 부산지방검찰청이 옛날의 구도심 지역에 있었으나 부산이 북동부 지역으로 확장되면서 발전하고 있었으므로 검찰의 신청사도 그 지역으로의 이전이 추진되고 있었다. 따라서 관사를 마련하더라도 신청사와 멀지 않은 곳이어야 했다. 경관이 좋은 해안가인 해운대와 광안리 해수욕장 부근이 좋을 것 같아 사무 당국에 지시하여 적당한 관사 후보 건물을 살펴보도록 일러두었다.


광안리 해수욕장 부근 남천동의 매립지를 중심으로 삼익건설에서 비치 아파트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그 부근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 아파트 단지의 적당한 아파트 1채가 매물로 나왔으므로 현지에 가서 살펴보니 새로 지은 아파트로서 위치와 구조가 좋아서 우선 그 아파트 1채만이라도 매입하여 검찰청과 집밖에 모르는 문종수 차장을 입주시키기로 작정하였다.


1차장과 2차장의 아파트 규모가 달라서는 안 될 일이므로 나중에 법무부에 요청하여 추가로 예산 지원을 받을 작정으로 상부에 보고한 후 그 아파트 한 채를 매입하고 즉시 제2차장인 문종수를 입주시켰다. 스스로 형이라고 자부하던 사람을 형 대접해 주는 최초의 배려였다. 관사인 아파트 매입의 예산 집행은 물론 제1차장의 소관 사무였기 때문이다.


문 차장이 남천동 삼익아파트에 입주한 다음, 법무부에 사정을 설명하고 추가 예산 지원을 약속받기에 이르렀다. 그 몇 개월 뒤 위 아파트와 같은 규모의 관사를 마련할 예산이 지원되었으므로 이제는 내가 들어갈 아파트를 물색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제1차장검사의 관사용 아파트 1채를 추가로 계약했다. 이때 새로 마련한 아파트는 위치가 2차장 관사보다 더 좋아서 아파트 뒤편으로 광안리 해수욕장의 전경이 들어오는 경관 좋은 집이었다. 그 아파트 단지 308동의 고층이었는데 지금 정확한 호수는 모르겠다.


두 차장검사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게 되었으므로 출퇴근을 함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서울지검 평검사 시절부터 자가 운전을 시작하여 그때까지 자동차를 3번씩이나 바꾸면서 누적 주행거리 50만 ㎞ 이상을 운전하며 다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문 차장은 운전면허는 있으나(이는 본인 주장이므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자동차 운전석에는 가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내가 운전사로서 내 차에 그를 모시고 출퇴근을 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너, 대통령 전용 차량 운전기사의 직급을 알고 있니? 박정희 대통령 시절, 그 차량의 운전사는 서기관급에 불과했다. 검사 중에서도 최고위 고등검찰관인 차장검사를 전속 운전사로 둔 너, 문종수의 벼슬은 도대체 무슨 이름의 벼슬이냐?”


문 차장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너는 복이 있어서 나 같은 사람을 차량 조수로 데리고 다니는 줄 알아라. 네가 상습적으로 난폭 운전을 하기에 너의 목숨을 이어 주려고 조수석에 앉아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하며 너를 모시고 다니는 내 마음을 그렇게도 모른단 말이냐?”


하여튼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1년 가까이 함께 다니며 친형제 이상 가는 우의를 지키면서 부산지검 차장검사의 직을 마쳤다. 부산지검에 1·2차장 제도가 시행된 기간 중 차장검사 두 사람이 이렇게 지낸 사례는 없었다고 자부한다. 두 차장검사가 이렇게 지냈으니 검찰청 전체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화기만당’이었던 것이다. 부산 시절 내가 운전한 차량은 현대자동차의 코티나 마크Ⅳ였다.


우리 두 차장검사가 함께 모신 검사장은 박희태(朴熺太) 씨였다. 우리가 부임하기 얼마 전에 시행된 검사장급 인사이동으로 대전지검장에서 부산지검장으로 발령되어 이미 그 직위에 있었다. 우리와 함께 부산지검장직을 떠나 신설된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을 끝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먼 훗날 국회의장직까지 역임했다.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던 고시 13회 선두 그룹의 한 사람이었다.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도 재치 있는 말과 적절한 유머를 곁들인 화법으로 많은 사람을 웃기는 등 소탈하면서도 재기발랄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이분은 1983년 자신이 개발한 양조기법을 전국으로 확산시켰다고 자부하는 폭탄주의 대가이기도 했다.


이분께서 경남의 남해라는 섬에서 태어났으나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데다 당시 부산에는 남해에서 이주하였던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부산은 그에게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성품이 원만하여 부하들을 괴롭히는 일이 전혀 없었음은 물론, 오히려 부하들을 전적으로 신임하면서 청을 이끌어 가고 있었으므로 검찰청은 늘 화기가 충만한 직장 분위기였다.


어느 날 퇴근에 앞서 두 차장이 검사장께 퇴근 인사를 드리기 위해 찾아갔다가 내가 직접 본 일이다.


검사장이 워낙 정치적인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부산에 남해 출신의 저명인사들이 많아 늘 바쁘게 지내며 지역의 각종 행사에 참석하는 일이 잦아서 거의 퇴근 무렵에 사무실에 들어오는 때도 많았다. 그날도 그런 사정이었던지, 검사장 부속실에 검사장의 결재를 바라는 수많은 사건 기록과 결재 서류가 쌓여 있었다. 우리 두 차장이 검사장실로 들어오는 것을 본 검사장이 부속실의 비서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야! 거기 부속실에 와 있는 모든 결재 서류에 내 도장을 다 찍어 내려보내라. 송종의와 문종수가 다 본 건데, 내가 또 볼 필요 없다.”


검사장으로서 의도적으로 한 말인지는 내가 판단할 수가 없으나, 저녁 무렵 검사장실에 쌓여 있던 수많은 결재 서류와 사건 기록이 한꺼번에 결재되어 내려가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한 바 있었다. 어떤 때는 2~3일 후 전국 검사장 회의나 서울의 중요 행사가 있어서 검사장이 상경해야 하는 예정 행사를 알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마땅히 살펴보아야 할 문서를 보지 않고 비서를 시켜 한꺼번에 결재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검사장의 결재 방법이 이러했으므로 우리 두 차장이 서로 상의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검사장이 진실로 우리 두 사람을 신임하여 저러는지, 아니면 의도적인지 따질 필요는 없다. 검사장의 결재가 저렇게 이루어지니 차장검사인 우리가 철저히 살펴보고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나겠다. 둘이 합심하여 철저히 보필해야 청이 제대로 돌아갈 것 같으니 서로 명심하여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자.


하여튼 검사장이 일일이 지시하거나 감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나 문 차장이나 모두 철저히 사무를 처리한 것은 이런 사정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부산지방검찰청이 인구 300만 명 이상의 부산이란 웅도에 자리 잡은 우리나라의 둘째가는 큰 지방검찰청이었으나 수도 서울에 비할 곳은 아니었다. 다만 이 지방이 박종철이란 민주 투사가 나온 지역이고, 당시에도 민주화를 외치는 군사정권에 대한 정통성 시비가 계속 이어져 미문화원 점거 농성 같은 공안사건이 빈발하고 있었으므로 반정부 세력의 동태를 감시하면서 이에 적절히 대처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당시의 검찰 업무 일지를 일별해 보았다. 통상적인 여러 검찰사무와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의 처리에 관한 기록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기는 하나, 별것도 아닌 어떤 사건의 피의자가 뒷날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1987. 2. 9. 피의자인 노무현(盧武鉉) 변호사에 대하여 검찰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였으나 법원의 H 판사가 검찰의 청구를 기각한 사건이다. 1990년 11월, 당시의 부산지방검찰청 김유후(金有厚) 검사장 재임 시 발간된 《부산지방검찰사》라는 정사(正史)에는 한 줄의 기재도 찾을 수 없는 대수롭지 않은 한 개의 공안사건이었다.

 
위 노무현 변호사는 내가 부산지방검찰청을 떠난 후 또 다른 범죄를 범하여 당시까지도 같은 직책을 맡고 있었던 공안부 소속 검사 손에 의해 이번에는 판사가 발부한 구속영장으로 구속되었으니 그의 길지 않은 인생행로가 이렇게도 순탄치 않았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부산지검 본청만은 검사장의 폭탄주 덕분에 검찰 간부들이 술자리에서 서로를 부르는 별호(別號) 하나씩이 생겼다. 검사장은 도인(道人), 차장검사는 선사(禪師), 부장검사는 법사(法師)의 이름으로 서로 호칭했다.

탄주도인(彈酒道人) - 폭탄주의 ‘폭’이란 한 글자 제거한 것이다.
율산선사(栗山禪師) - 밤나무를 심어 가꾸던 나의 별호이다.
노장선사(老長禪師) - 기독교의 장로였던 사람을 글자를 바꾸어 놓은 것으로 문 차장의 별호이다.

나머지 부장검사인 법사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허명(虛名) - 술 잘 먹는다고 헛소문만 났던 사람
광설(廣舌) - 장광설의 ‘장’이란 한 글자가 없어진 것으로 술자리에서 말이 많은 사람
적안(赤眼) - 술 한 잔 들어가면 즉시 안색이 붉어지는 사람
가창(歌唱) - 술이 거나해지면 차중락의 창법으로 노래를 잘 부르던 사람
석팔(石八) - 술자리에서 수지침이나 뜸을 강의하면서 즉석 시술을 시도하던 반돌팔이 의사
취면(醉眠) - 술만 먹으면 즉시 누워 잠드는 사람
우일(又一) - 술이 1차로 끝나지 않고, 딱 한 잔이란 구실로 반드시 2차를 가는 사람
무량(無量) - 글자 그대로 주량을 가늠할 수 없는 대주가

부산지방검찰청 근무 후 검사장은 신설된 부산고등검찰청의 검사장으로, 나와 문 차장은 모두 검사장 직급으로 승진하면서 나는 법무부의 기획관리실장으로, 문 차장은 사법연수원의 부원장으로 같은 날 전보되었다.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송무백열(松茂栢悅)’이란 말의 뜻을 알게 하는 인사 발령이었다.


그 며칠 뒤에 박희태 검사장께서 내게 영전 기념패를 보내주셨다. 그 기념패에 새겨진 문장이 독특하여 나도 웃으며 여기에 옮겨 적는다.


“귀하께서 금반 검사장으로 승진하여 법무부 기획관리실장으로 임명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특히 귀하와 더불어 부산지방검찰청에서 웃고 즐기던 정을 더욱 깊이 간직하고자 이 패를 드립니다.”

내가 법무부 기획관리실장을 전보된 후 고등검찰관 검사의 연명으로 제작된 나의 재직기념패가 전달되었다. 그 패에 새겨진 명단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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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제1부장검사 車正一. 형사 제2부장검사 薛景鎭. 형사 제3부장검사 李弘.
형사 제4부장검사 趙嘉允. 공안 부장검사 周善會. 특별수사 부장검사 河茂根.
공판 부장검사 金祥駿. 고등검찰관 吳鍾根.

위 간부 중 3인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그들의 명복을 빈다. 모든 직원의 존경받는 소탈한 성품의 상사였던 박희태 검사장님께 경의를 표하며, 어려운 여러 공안사건의 처리에 노심초사하였던 주선회(周善會) 공안부장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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