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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으로 만나는 클래식

[영상으로 만나는 클래식] 오페라 ‘루살카’의 예로 본 레지테아터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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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오페라가 탄생한 이래 지금까지 2만5000편이 넘는 작품이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반복 공연되는 오페라는 많지 않다. 웬만한 애호가라도 오페라 제목 100편 이상을 대기는 힘들 것이고, 인기작 상위 수십 편이 세계 오페라하우스 공연 목록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과거에는 같은 오페라의 출연진이 다른 음반들을 구해 음악적 완성도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감상의 다양성을 확보해야 했다. 영상 감상이 일반화된 지금은 다르다. 가수와 지휘 못지않게 연출의 비중이 확대되었기에 같은 오페라라도 ‘연극적 해석’을 통해 여러 관점을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연출자의 역할이 커진 사례로 ‘레지테아터(Regietheater)'를 꼽을 수 있다. 연극 강국 독일에서 시작되어 지금도 그곳이 중심이기에 독일어로 표기한다. 레지테아터에서는 시대, 장소는 물론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상황까지도 대본을 완전히 재해석할 수 있다. 게다가 정통 오페라에서는 음악과 대본에는 손대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기에 연출가에게는 힘들지만 한층 창조적인 도전이 된다.



‘달에게 부치는 노래’로 유명한 드보르작의 오페라 <루살카>(1904)의 예를 보자. 호숫가 물의 요정 루살카는 이곳에 사냥 오는 인간 왕자에게 반한다. 요정들의 보호자 보드니크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루살카는 마녀 예지바바를 찾아가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읍소한다. 예지바바는 목소리를 잃는다는 조건으로 루살카의 소원을 들어준다. 루살카를 보자마자 반한 왕자는 성으로 데려가지만 결국 몸이 차갑고 말도 통하지 않는 그녀를 버리고 외국 공주의 유혹에 넘어간다. 쓸쓸히 돌아온 루살카에게 예지바바는 왕자의 목숨을 빼앗아야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 뒤늦게 후회하며 달려온 왕자는 루살카의 입맞춤을 갈구하며 기꺼이 죽음을 맞는다.

크리스토프 로이가 연출한 2020년 테아트로 레알 마드리드 실황(사진)에서 루살카는 다리를 다쳐 재활 중인 무명 발레리나다. 그녀가 반한 남자는 극장 분장실을 찾아다니며 가수나 무용수를 꼬시는 부르주아쯤 될 것이고, 보드니크는 발레단 감독, 예지바바는 극장 돈줄을 쥔 매표소 관리자다. 외국 공주는 객원 주역으로 초빙된 프리마돈나로 보인다. 같은 대본인데도 이렇게 설정을 바꾸면 관객 입장에서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는 것 같다. 물론 기발한 아이디어는 레지테아터의 출발에 불과하다. 대본의 행간 또는 음악적인 표현과 계속 잘 어울려서 전체적인 완성도를 높여야 성공적인 연출이다.

반면 마틴 쿠세이가 연출한 바이에른 국립오페라 실황에는 오스트리아를 들끓게 했던 일명 나타샤 캄푸쉬 사건과 요제프 프리츨 사건이 투영되었다. 루살카는 납치, 감금에서 겨우 벗어나 세상에 나온 소녀지만 외부와 워낙 오래 격리된 터라 적응하지 못하고, 종국엔 정신병원에 들어간 신세가 된다. 스테판 헤르하임이 연출한 벨기에 모네 가극장 실황은 아예 루살카를 홍등가 여인으로 만들었다. 만약 누군가 필자에게 연출 아이디어를 묻는다면 루살카를 베트남 하롱베이의 처녀로 해보라고 하겠다. 한국 남자를 사랑하지만 말조차 통하지 않아 소외당하는! 이런 식으로 감상의 지평과 인식의 차원을 넓힐 수 있는 것이 레지테아터의 매력이다.


유형종 대표(무지크바움·음악&무용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