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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철의 문향(文香) 오디세이

[고승철의 문향(文香) 오디세이] 예술과 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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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회, 허명회 소년 형제는 아틀리에 한 구석에 앉아 외삼촌이 흙을 빚어 조형물을 만드는 작업을 지켜봤다. 처자식이 없는 외삼촌은 조카들과 함께 기거하며 아침에 눈만 뜨면 작업실로 향했다. 소년들은 외삼촌이 그렇게 유명한 조각가인 줄 몰랐다. 훗날 세인들은 ‘비운(悲運)의 천재 조각가’라 불렀다. 조카들의 눈에는 외삼촌이 타고 난 천재라기보다는 작품 하나를 완성하려 온몸을 던지는 구도자(求道者)로 보였다. 외삼촌은 권진규(1922~1973) 각백(刻伯)이다. 대가급 화가를 화백(畵伯)이라 부르듯 훌륭한 조각가는 ‘각백’으로 불린다. 소년들의 어머니(권경숙)는 외롭고 가난한 오빠를 서울 동선동 집에서 오래 뒷바라지했다.

올봄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권진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노실(爐室)의 천사’ 전시회가 열렸다. 조카 허경회도 이제 칠순이 되었으니 세월이 꽤 흘렀다. 외삼촌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밝히는 책자 <권진규>를 저술했다.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경제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조카는 자신이 조형예술에 대해 문외한이라고 겸허하게 말하지만 작품 탄생 과정을 지켜본 관찰자의 뜻 깊은 시선이 이 책에 담겨있다.

조카 허명회는 전시회에서 작품을 해설하는 도슨트 역할을 자임했다. 그도 비(非)미술인이지만 흙덩이가 화로에 들어가 ‘테라 코타’로 구워져 나오는 광경을 목도했기에 생생한 해설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요즘 ‘고려대 통계학과 명예교수’라는 직함보다는 ‘필즈상 수상자 허준이 교수의 아버지’로 더 주목 받는다. 허명회 교수의 부인은 해외문학에 정통한 이인영 전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이다. 수학자 허준이 교수는 이렇듯 예술가 혈통을 이어받았다.

세계적인 수학자 황준묵 고등과학원 교수는 양친이 예술가이다. 아버지는 황병기 가야금 명인, 어머니는 한말숙 소설가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뜯는 가야금 음률과 어머니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예술 환경 덕분인지 수학 난제를 풀 때 엄청난 창의력을 발휘했다. 황병기 명인은 서울대 법대를 다닌 법학도였는데 음악 열정 때문에 법전을 놓고 가야금을 잡았다.

정상급 수학자인 김민형 영국 워릭대 교수도 코흘리개 때부터 집에서 인문학 향기를 맡았다. 아버지는 문학평론가인 석학(碩學) 김우창 교수, 어머니는 한국문학을 영역(英譯)하는 데 앞장선 영문학자 설순봉 여사이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처음 국역한 설의식 언론인, 셰익스피어 작 <햄릿>을 번역한 영문학자 설정식 시인이 설 여사의 숙부들이다. ‘의리’를 외치는 김보성 배우는 설 여사의 집안 조카이다.

필자는 언젠가 김우창 교수 내외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수학자 아드님의 성장 과정을 집중적으로 물은 적이 있다.

“걔가 몸이 아파 중고등학교를 제대로 못 다니고 집에서 요양했어요. 건강이 최우선이기에 공부에 대해선 이래라저래라 말할 상황이 아니었지요. 서재에서 온갖 책을 꺼내 읽더군요. 검정고시를 거쳐 고려대 철학과에 갔지요. 1학년 때 수학에 관심을 보여 수학 전공 교수에게 상담을 받아보게 했더니 재능을 가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서울대 수학과로 진학했습니다.”

예술과 수학. 전혀 다른 분야인 듯하지만 고도의 창의성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위대한 수학자인 피타고라스가 고대 음악의 비조(鼻祖)인 점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가 작곡한 ‘평균율’은 정교한 수학 원리의 산물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말마따나 ‘문화 자본’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 ‘월드 클래스’ 수학자가 되려면 대치동 학원, 수학올림피아드 코스보다는 예술, 인문학 등으로 먼저 상상력 근육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고승철 언론인·저술가(전 동아일보 출판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