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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 Culture

[고승철의 문향(文香) 오디세이] 조자룡 교수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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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조자룡 교수님을 아십니까?”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생들에게 이렇게 물어보면 대부분이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분의 애제자로 알려진 분에게 질문해도 마찬가지다.

 
6월 23일 타계한 경제학 분야의 거목 조순(趙淳) 서울대 명예교수의 빈소에서도 필자는 몇몇 문상객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고인이 한국은행 총재 재임 때 함께 일했던 한국은행 간부들도 조자룡(趙子龍) 교수가 누구인지 몰랐다. 고인은 ‘조자룡’에서 ‘조순’으로 개명했는데, 이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인의 수제자인 정운찬 전 총리는 스승의 개명 사실은 아는데 언제,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다 말했다. 선생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시는데 굳이 묻기가 민망했다고 한다. 정 전 총리는 지난 5월 스승의 날을 즈음하여 <나의 스승, 나의 인생>이란 책을 냈다. 조순 선생과 저자의 55년간 인연을 회고한 내용이다. 스승은 학문으로는 큰 가르침을 주었고 인생사에서는 직장 알선, 유학 추천, 결혼 조언 등 자상한 멘토 역할을 했다.

 
조순 교수는 엄부(嚴父)였다. 서울대 경제학과 학생인 장남(조기송)은 전공 필수과목을 아버지에게서 수강할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장남의 기말고사 답안지가 실종되었다. 아버지는 재시험 기회를 주지 않고 가차 없이 F학점을 매겼다.‘아빠 역(逆) 찬스’였던 셈이다.

 

조자룡이란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을 필자는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의 저서 <백년의 사람들>에서 읽고 알았다. 1941년 봄 평양중학에 입학한 김동길 소년은 동급생 조자룡을 만났다. 강릉 출신의 우등생이었다. 세월이 흘러 1970년대 어느 가을 날, 김 교수는 서울 순화동 풀브라이트 하우스에서 열린 조순 서울대 교수의 강연에 참석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는데 누군지 확실치 않았다. 김 교수는 강릉 출신자들을 만날 때마다 조자룡이라는 분을 아는지 물었다. 마침 연희전문 출신의 어느 분이 “조자룡이 바로 조순!”이라 밝혔다. 평양중학 동기생 둘은 다시 만나 회포를 풀었다. ‘장수 클럽’이란 친목모임에서 정기적으로 회동하기도 했다.

 
조자룡 학생이 평양으로 유학을 간 것은 그곳에서 판사로 근무하는 조평재 숙부에게 의탁하기 위해서였다. 강릉에서 가난한 한학자(漢學者)로 살아가는 아버지(조정재)는 아들의 상급학교 등록금을 댈 형편이 되지 못했다. 숙부는 강릉이 낳은 인재였다. 경성제대를 나와 1937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법조인이 되었다. 1943년 4월엔 서울에 와서 변호사로 개업하는데 이때 조자룡은 경기공립중학교(현재 경기고)로 전학한다. 조 변호사는 광복 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피고인 측 변호를 맡은 거물 법조인이었다.

 
조자룡 학생은 경성고상(서울대 상대 전신)을 나와 강릉농고에서 영어 교사를 하다가 6·25 전쟁 때 통역장교를 거쳐 진해에서 개교한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 영어 교관이 되었다. 11기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정호용 생도와 12기 박세직, 박준병, 박희도 생도를 가르쳤다.

 
필자가 조순 교수에 대해 이렇게 시시콜콜 아는 이유는 1989년 <학자와 부총리>라는 저서를 내면서 여러 사항을 취재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로서 가졌던 경세(經世) 철학이 경제부총리가 된 이후엔 어떻게 실천되는지, 변형되는지를 탐구한 내용이다. 당시 출판을 탐탁찮게 여겼던 그분은 세월이 흘러 작년에 봉천동 자택에 찾아간 필자에게 “그 책 여분이 있으면 몇 권 보내주시게!”라고 말씀하셨다.

 

사람 인연이 묘한 것이, 필자가 동아일보에 근무할 때 수습기자 면접에 들어갔는데 어느 여성 지원자(조경복)를 보니 누군가를 빼 닮았다. 알고 보니 조순 교수의 손녀였다. ‘할아버지 찬스’ 없이 당당히 합격해 몇 년간 민완기자로 활약했다.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틴 조자룡 군이 무슨 이유로, 어떤 심경으로 개명했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고승철 언론인·저술가(전 동아일보 출판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