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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검찰의 피해자 유도신문… 녹화영상으로 ‘들통’

법조계, 진술증거 중심 수사 관행에 비판 목소리

리걸에듀

검사가 성폭력 사건 조사 때 피해자에게 경찰 진술조서를 보여주는 등 유도신문을 통해 범죄피해 진술을 받아내 피고인의 혐의를 입증하려다 법원에서 제동이 걸렸다. 조사 내용을 미심쩍게 생각한 변호인이 검찰 조사 장면이 담긴 영상녹화물을 열람해 이 같은 사실을 발견하고 재판 때 문제의 심각성을 주장했는데, 법원이 받아들인 것이다. 법원은 검찰이 경찰 진술조서와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피고인에게 유리한 부분을 삭제하는 등 진술내용을 짜맞춘 정황이 뚜렷하다고 보고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조계에서는 낡은 수사관행에 대한 비판과 함께 대안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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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법조계에 따르면, 광주지법 순천지원 형사1부(재판장 송백현 부장판사)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A(19)씨에게 지난해 11월 무죄를 선고(2019고합131)한 데 이어, 항소심인 광주고법 형사1부(재판장 이승철 고법판사)도 "피해자가 진술한 피해사실 중 일부에 신빙성이 결여돼 공소사실 증명이 없다"며 지난 달 24일 검찰의 항소를 기각하고 1심 판단을 유지했다(2020노423). 검찰이 상고하지 않아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이 사건은 B(17)양이 2019년 DVD방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며 전 남자친구인 A씨를 경찰에 고소하면서 시작됐다. A씨는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고 주장했지만, 검찰은 그를 불구속 기소했다.


성폭행 피해자 진술조서에 

의문 품은 피고인 측

검찰 직접방문

 피해자 조사·진술 녹화영상 대조


하지만 A씨의 변호를 맡은 김정환(38·변호사시험 2회) JY법률사무소 부대표변호사가 검찰의 공소사실과 피해자 진술조서의 진정성 등에 의문을 품으면서 사건은 변곡점을 맞았다. 김 변호사는 A씨를 기소한 순천지청을 찾아가 6시간에 걸쳐 B양에 대한 피해자 조사 진술 녹화본과 검찰 진술녹화 속기록, 검찰 진술조서 등을 대조했다. 청소년성보호법 제26조 등은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피해자의 진술내용과 조사과정은 수사기관이 비디오녹화기 등 영상물 녹화장치로 촬영·보존하도록 하고 있으며, 영상물 내 피해자 진술은 진정성이 인정될 때 공판에서 증거로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공판에 제출되는 피해자 진술조서는 검사와 피해자 간 문답이 그대로 기록되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검사의 주관이나 의도가 개입될 여지가 있다는 점에 착안해 피해자 조사 영상녹화물과 대조를 시도한 것이다. 그 결과 영상녹화물에서 검사가 B양에게 경찰 진술조서 등을 보여준 다음 피해사실을 진술하게 하는 등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다수 발견했다. 김 변호사는 이를 재판과정에서 적극 주장했고 법원도 이를 받아들였다.


법원은 피해자 신체에서 피해자 진술과 같은 성폭력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점 외에도 B양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아 신빙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검찰 조사 과정에서 유도신문이 이뤄지는 등 왜곡 가능성도 높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가해자 관점에서 피해자다움을 전제한 다음 성폭력 당한 직후 피해자의 모습이 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의 신빙성을 쉽사리 배척해서는 안 된다"면서도 "(이 사건에서) 피해자가 피고인과 함께 있었던 시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삽입 이후 상황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구체적으로 진술하지 못하는 것은 선뜻 납득이 되지 않고 진술의 신빙성에 의문을 품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해자는 경찰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피고인이 피해자의 반항을 제압하고 간음하게 된 경위에 관해 구체적으로 진술했는데, 검찰 조사 과정에서는 DVD방에서 자신의 양 팔목을 잡은 상황까지는 기억에 의존해 진술하다가 그 이후 상황을 묻는 검사의 질문에는 검사로부터 (성폭행 피해상황이 적힌) 기록을 받아 46초가량 읽은 후 비로소 진술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피해자가  

경찰 진술조서 본 후 답하는 장면 포착


그러면서 "기억 환기를 위해 종전 진술내용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하더라도, 범행 주요부분에 대해서조차 자신의 기억대로가 아닌 경찰 진술을 참고한 뒤에야 비로소 대답했다. 이러한 조사방식을 통해 얻어진 피해자 검찰 진술을 기억대로 진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검찰 조사에서 경찰에서 진술하지 않았던 부분을 새롭게 추가하거나 범행의 주요 부분 진술을 변경하기도 하고, 이마저도 대부분 검사의 유도신문에 의해 진술해 피해자의 검찰 진술이 경찰 진술과 일관된다고 평가하기 어렵다"고 했다.

재판부는 또 "법정 진술에서도 구체적 방법과 당시 상황 등 주요 부분을 제대로 진술하지 못해 의문이 든다"며 "검사가 (공판에서) 검찰 진술조서 내용을 읽어주고 나서 검찰 진술조서 내용과 같이 대답을 했다"면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A군을 변호한 김 변호사는 "성범죄 사건에서는 피해자 진술이 주요 증거인 경우가 많은데, 피의자에 대한 반대 신문권이 충분하게 보장되지 않고 검찰이 고소인에 치우쳐 수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며 "검찰청을 직접 방문해 영상녹화물을 보지 않았다면 피고인이 자칫 억울한 처벌을 받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법원

 “피해자 진술조서 신빙성 결여

피고인 무죄”

 

이 사건에 대해 검찰은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다만 한 검찰 관계자는 검찰이 대법원에 상고를 하지 않은 이유와 관련해 "기계적 상고를 막기 위해 1,2심 모두 무죄 판결이 선고된 경우에는 상고를 포기하는 것이 기본 방침"이라고 말했다.

법조계에서는 객관적 물증을 확보하는 대신 피해자 등의 진술에 의존하는 낡은 수사관행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검찰 출신 한 변호사는 "'조서를 작성한다'는 말 대신 '조서를 꾸민다'는 말이 더 많이 쓰이는데, 그만큼 사건 관계인에 대한 진술 조사에서 조서 작성자인 검사나 검찰수사관의 주관적 의도가 개입될 여지가 높다는 의미"라며 "공판중심주의로의 기조 변화에 발맞춰 검찰 조서 등의 증거능력을 제한하는 한편, 수사기관도 진술에 의존하던 수사 관행에서 벗어나 객관적 물증을 찾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성범죄 사건 등에서는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만으로도 유죄 판결이 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수사기관의 개입에 따른 '학습된 진술'이 생기곤 한다"며 "수사의 초점이 조서에서 객관적 증거 확보로 옮겨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완규(60·사법연수원 23기) 변호사는 "검찰 작성 조서의 증거능력을 무조건 배제하면 검사들이 공소제기에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피해는 국민들에게 돌아갈 수도 있다"며 "영상녹화물의 증거 능력을 보완하는 보완 입법도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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