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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판례

암호화폐와 자동화된 계약에 관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판결

- B2C2 Ltd v Quoine Pte Ltd [2019] SGHC(I) 3 -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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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사실관계

피고(Quoine Pte Ltd)는 암호화폐 거래 플랫폼(이하 '플랫폼'이라고 한다) 사업자이며 해당 플랫폼은 회원인 제3자가 암호화폐를 다른 암호화폐 또는 명목화폐로 거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원고(B2C2 Ltd)는 전자시장 형성자(e-market maker)로 피고의 플랫폼 내에서 암호화폐 거래를 하는 당사자였다. 2017년 4월 19일 어떤 사건으로 인해 플랫폼의 소프트웨어가 제대로 동작하지 아니하였고 이로 인해 원고의 플랫폼 내의 다른 당사자와의 7건의 암호화폐 거래[비트코인(BTC)과 이더리움(ETH)을 교환하는 거래]가 10BTC=1ETH의 비율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0.04BTC=1ETH였던 당시의 시세보다 250배 높은 비율이었으며 원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이었다. 거래 직후 거래의 수익(proceeds)은 원고의 계좌에 자동으로 적립되었다. 다음날 피고의 수석 기술책임자는 소프트웨어의 문제를 인지하였고 이후 원고의 거래를 취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좌에 적립된 거래의 수익도 원상으로 복구하였는데 이는 피고 플랫폼 내의 암호화폐 거래는 비가역적(irreversible)이라고 규정한 약관조항을 위배한 것이었다.


원고는 피고를 상대로 소를 제기하면서 ① 피고가 일방적으로 원고의 거래를 취소하고 계좌에 적립된 수익을 원상으로 회복시킨 것은 플랫폼 내에서의 거래를 규율하는 약관조항의 위반으로 계약위반(breach of contract)일 뿐만 아니라 ② 신탁 의무 위반(breach of trust)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피고는 ① 원고와 피고 사이에는 계약위반이 존재하지 아니하고 설령 계약위반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계약은 착오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효력이 없고 ② 원고와 피고 사이에 신탁 의무 위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투었다.


Ⅱ. 쟁점과 법원의 판단
1. 자동화된 계약의 효력 여부

대상판결에서 암호화폐 거래는 플랫폼을 통하여 인간의 개입 없이 프로그램에 의해 자동으로 이루어졌다. 계약위반을 판단하기 위한 전제로 이처럼 자동화된 계약이 계약으로서의 효력을 가지는가에 대해 법원은 플랫폼에서의 암호화폐 거래에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계약법적 관계가 존재한다고 보아 그 효력을 인정하였다. 다만 법원은 인공지능과 같이 프로그램 스스로 의사결정에 기반한 독립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동적 프로그램과 단순히 입력된 명령을 수행하기만 하는 수동적 프로그램을 구분하면서 대상판결의 경우 수동적 프로그램이 문제가 되었으므로 기존의 계약법상 원칙을 직접 적용하는 데 큰 문제가 없지만 추후 능동적 프로그램이 문제 될 때는 이와 다른 접근법이 필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2. 계약위반 여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플랫폼 내에서의 암호화폐 거래는 '비가역적'이라는 명시적 규정이 약관에 존재하였다. 피고는 비록 약관에서 그와 같이 규정하고 있지만 시스템상의 기술적 오류 등에 의해 비정상적인 비율이나 가격으로 거래가 행해졌을 때는 피고에 의해 해당 거래를 원상으로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묵시적 조항(implied terms)이 약관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비가역적'이라는 규정은 플랫폼 내에서 거래하는 당사자 사이에서만 그 효력을 미칠 뿐 피고가 이와 같은 거래를 원상으로 회복하는 것을 제한하는 취지는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법원은 '비가역적'이라는 규정은 피고를 포함한 모든 당사자에게 효력을 미치는 것이며 피고가 주장한 묵시적 조항에 대해서는 그 내용이 약관상의 명시적 조항과 명백히 배치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해당 조항이 인정될 필요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 피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다음으로 피고는 웹사이트에 거래가 비정상적인 가액으로 이루어졌을 때 그 거래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하는 명시적 조항이 포함된 위험공시조항을 게시하였으므로 원고의 거래를 원상으로 돌릴 권한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법원은 원칙적으로 계약의 내용이 계약으로서의 구속력을 가지지 아니하는 다른 문서에 포함될 수는 있지만 그와 같은 때에는 해당 조항이 그러한 취지임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기초로 법원은 약관이나 위험공시조항 어디에서나 이 둘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내용이 존재하지 아니함을 이유로 피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세 번째로 피고는 일방적 착오의 법리(doctrine of unilateral mistake)를 들어 원고와 다른 당사자 사이의 계약은 그 효력이 없으며 그러므로 피고가 거래를 원상으로 되돌린 것은 약관조항을 위배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법원은 우선 플랫폼의 프로그램이 알고리즘에 의해 프로그램된 대로의 작업만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대상판결과 같이 컴퓨터 내의 거래 관련 프로그램의 작동이 쟁점이 된 사안에서 그 의도나 착오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해당 프로그램이 작성될 시점에 문제된 부분을 담당한 프로그래머를 그 기준으로 고려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법원은 판시하였는데 결과적으로 프로그램에 따라 인간의 관여 없이 자동으로 이루어진 계약에서 해당 계약이 착오를 이유로 그 효력이 없음을 주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착오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대상이 프로그램이 작성될 당시의 프로그래머라고 본 것이다. 이를 전제로 하여 법원은 프로그래머가 착오에 대해 실질적으로 알지 못하였다고 보았고 그의 작업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존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에게서 악의를 인정할 수는 없다고 보아 이에 대한 피고의 주장 또한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3. 신탁 의무 위반 여부

대상판결에서 신탁 의무 위반에 관한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위한 전제로 암호화폐에 대한 신탁이 성립될 수 있는지와 당사자 사이에 신탁관계가 존재하는지가 문제 되었다. 대상판결에서 원고와 피고 사이에는 암호화폐가 신탁의 대상이 된다는 명시적 약정이 존재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법원은 이를 판단하기 위해 판례에서의 전통적 기준인 ① 신탁 설정 의사의 확정성 ② 신탁재산의 확정성 ③ 신탁 목적의 확정성을 기준으로 하였다.


우선 신탁 설정 의사의 확정성과 관련하여 법원은 비록 명시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피고가 그의 자산과는 별개로 플랫폼 내에 별개의 계좌로 다른 사용자들의 자산을 보관하고 있는 것에서 미루어볼 때 이를 인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신탁재산의 확정성과 관련하여 암호화폐를 신탁재산으로 볼 수 있는지가 문제 되었는데 법원은 암호화폐는 정부에 의해 발행되어 일정한 규제를 받는 종류의 법정통화는 아니지만 가치를 지닌 유형물로 판별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무형재산(intangible property)의 근본적인 특성이 있다고 판시하여 이를 인정하였다. 마지막으로 신탁 목적의 확정성에 관하여서는 플랫폼 내의 개별 계정 번호를 통하여 신탁의 수익자를 식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해당 요건을 만족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판단에 근거하여 법원은 원고와 피고 사이의 신탁관계가 성립한다고 보았고 그러한 판단에 기초하여 피고가 암호화폐 거래의 원상회복에 대한 권한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원고의 계좌에서 암호화폐를 일방적으로 이전한 행위는 신탁 의무 위반이라고 판시하였다.



4. 적절한 구제수단의 문제

법원은 위의 내용을 기초로 원고의 거래를 일방적으로 되돌린 피고의 행위는 계약위반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신탁 의무 위반이라고 판단하였다. 다만 원고는 원래 환율대로의 거래의 재실행이라는 특정이행(specific performance)을 그 구제수단으로 구하였는데 이에 대해 법원은 원고가 투자자가 아닌 전자시장 형성자일 뿐만 아니라 원고의 거래가 원상으로 되돌려지기 이전에 이미 원고가 그의 비트코인 수익 중 3분의 1 정도를 매각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특정이행을 인정하는 것은 피고의 처지에서 과도한 부담이 될 우려가 있고 시장에서의 변동성을 고려할 때 손해배상이 더욱 적절한 구제수단이라고 하여 이를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또한 손해배상이 당사자에 의해 합의되지 않으면 추후의 심리를 통해 이를 산정할 것이라고 하였다.


Ⅲ. 나가며

대상판결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작성된 자동화된 계약에서 일방적 착오의 문제를 판단하면서 프로그램 작성 당시 프로그래머의 내심의 상태를 그 기준으로 하였다는 점, 암호화폐가 무형재산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신탁의 대상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점을 밝혔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인정할 수 있다. 다만 대상판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인공지능과 같은 능동적 프로그램의 경우 다른 접근법이 요구될 수 있다는 점, 기술혁신에 대비한 법적 원칙을 만들고 적용해야 하는 변화의 시기가 도래했다는 점 등에서 미루어볼 때 앞으로 해당 분야에서의 법률과 판례가 기술혁신에 대응하여 어떻게 변화해나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환 연구위원(사법정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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