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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법원, 특허법원

병원으로 찾아간 법원… 아내 살해 치매노인에 '집유'

서울고법 형사1부, '치료적 사법' 프로그램 시행 뒤 감형
"실형 선고보다 치료 계속 받도록 하는 것이 헌법에 부합"

10일 환자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A(68)씨가 휠체어에 탄 채 문을 들어섰다.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그는 항소심 판결을 받기 위해 모습을 나타냈지만, 그가 출석한 곳은 법원이 아닌 그가 입원한 병원의 한 회의실이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알츠하이머 환자(치매 환자)에 대한 '치료적 사법' 사건의 선고 공판 모습이다.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정준영 부장판사)는 이날 살인 혐의로 기소된 A씨의 항소심(2019노947) 선고공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한 1심을 취소하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또 집행유예 기간 5년 동안 보호관찰을 명하고, 특별준수사항으로 법무부 보호관찰관 감독 하에 치매전문병원으로 주거를 제한한 상태에서 계속 치료받을 것을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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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선고공판은 A씨가 입원한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는 한 치매전문병원에서 열렸다. 병원 내 5평 남짓한 사무실에 재판부석과 검사석, 변호인석, 피고인석 등이 포함된 간이법정이 마련됐다. 

 

A씨는 2018년 11월 아내를 폭행하고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앞서 1심은 A씨가 범행 후 흉기를 숨겼다는 등의 이유로 심신상실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이어진 2심에서는 상황이 바뀌었다. A씨의 치매가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항소심 재판부는 치매환자에 대해 치료적 사법 프로그램을 도입해 재판을 진행하기로 했다. 치료적 사법은 피고인에 대해 처벌이 아닌 문제 해결에 목적을 두고 정신장애적 특성을 가진 범죄자에 대해 사법에서 치료적 조치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지난해 6월 A씨에 대해 직권으로 보석을 허가하고, A씨의 주거지를 병원으로 제한해 사실상 구금하고 치료 경과를 지켜보며 재판을 진행해왔다.

 

재판에 참여한 A씨의 아들은 "치료적 사법으로 아버지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아버지는 (이런 상황을) 전혀 알지도 못하고, 병원에 있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불과 1~3분 전의 일도 까먹는다"고 말했다.

 

검사는 "개인적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사건이지만, 형사제도는 범행을 처벌하고 사회를 범죄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라며 "검사로서는 개인적인 감정보다 국가의 기능과 국민을 구하기 위한 입장에서 말씀드릴 수밖에 없다"며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검찰과 변호인의 의견을 들은 재판부는 이날 1심보다 가벼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등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는 범행 수법이 잔혹하고 결과가 중대해 엄한 처벌이 마땅하지만,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고, 그 상태는 범행 후에 더 악화해 현재 중증 알츠하이머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치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피고인에게 교정시설에서 징역형을 집행하는 것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해 정당하다는 평가를 받기 어렵다"며 "실형을 선고하는 것보다 치료명령과 보호관찰을 붙인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피고인이 계속 치료받도록 하는 것이 모든 국민이 인간의 존엄성을 가진다고 선언한 헌법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A씨는 재판부의 선고가 이어지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선고가 끝나자 A씨는 병원 직원이 이끄는 휠체어를 탄 채 병실로 이동했다. 

 

A씨의 변호를 맡은 김선옥(36·45기) 변호사는 "법원·검찰 그리고 피고인의 가족들 그리고 병원의 적극적 협조와 노력이 있어 가능했던 전향적 판결"이라며 "치료적 사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각 기관의 적극적 노력과 협조가 필요해 유사사건에 보편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 치료법원과 같은 제도가 우리나라에서도 잘 정비돼 활성화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 재판부는 박근혜정부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을 담당하고 있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에게 삼성그룹 전반의 준법체계를 감시할 제도 마련을 주문해 주목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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