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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법원행정처

朴대통령 살해, 내란목적인가 단순 살인인가

영화 ‘남산의 부장들’ 흥행 속 당시 대법원 판결문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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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을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 11일 만인 지난 1일 관람객 400만명을 돌파하며 흥행몰이를 하면서 박 대통령을 총격 살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재조명 받고 있다. 대법원은 당시 '대법원 판사(현 대법관에 해당)' 14명이 전원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서 김 부장 사건을 심리했다. 박 대통령 암살을 내란목적 살인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단순 살인으로 볼 것인지를 놓고 대법관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고 결국 8대 6의 의견으로 내란목적 살인죄가 인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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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쇼박스

 김 부장은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청와대 부근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 전 대통령과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을 총격 살해했다. 이른바 '10·26사건'이다. 정부는 사건 다음날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김 부장은 사건 발생 이틀 만인 28일 체포됐다. 사건을 조사한 계엄사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는 그 해 11월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내란목적 살인 사건으로 규정 짓고 사건을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했으며, 김 부장은 내란목적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1,2심 끝에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 미수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대법원에서는 대통령 총격 살해를 내란목적 살인으로 봐야할지, 단순 살인으로 봐야할지가 쟁점이 됐다. 당초 사건은 형사3부(안병수, 주심 유태흥, 양병호, 서윤홍)에 배당했지만, 심리과정에서 내란목적 살인이 아닌 단순 살인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사건은 전원합의체로 넘어갔다.

 

대법원 전합에서도 대법원 판사들 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결국 1980년 5월 20일 8대 6의 의견으로 상고기각 판결이 선고됐고, 김 부장에게는 내란목적 살인 혐의 등으로 사형이 확정됐다(당시 법원조직법은 대법원 판사는 대법원장 외 15인까지 둘 수 있도록 규정했다).

 

당시 대법원 판결문을 살펴보면 소수의견을 낸 민문기, 양병호, 임항준, 김윤행, 정태원, 서윤홍 등 6명의 대법원 판사는 대통령 살해를 곧바로 통치기구 전복이라는 국헌문란 행위로 볼 수는 없다며 내란목적 살인죄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당초 형사3부에 배당되었지만

합의 안돼 ‘전합’으로

  

이들은 "10·26 사건 이후 개헌에 대한 전국적인 합의가 있은 후에 재판함에 있어, 범행시의 체제와 재판시의 체제가 달라졌으므로 내란죄로는 처벌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국헌문란의 목적이라 함은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불법으로 철폐·소멸시키고 국가의 기본조직인 통치기구 기타 헌법기관을 폭력으로 파괴·전복하는 것을 말한다"며 "쿠테타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국헌문란의 목적을 말하는 것으로 인정할 근거도 없을 뿐 아니라, 대통령직에 있는 자연인을 살해하는 범행에 가담실행한 것이 대통령이라는 헌법기관 그 자체를 폭력으로 전복하고 그 권한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국헌문란 목적의 살해범행에 가담실행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견해는 우리의 경험칙 및 논리칙상 비약된 이론이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대통령 살해가 곧 통치기구 전복,

국헌문란행위 안돼”

 

나아가 "내란죄가 성립되려면 반드시 다수인의 결합이 필요한데 10명 내외의 사람의 집합만으로는 다수인이라고 볼 수 없다"며 "대통령 등의 살해로써 폭동은 끝난 것이고, 그 후 비상계엄을 선포하도록 유도한 것은 사태를 수습하고 기도한 거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을 조용히 밟으려는 것이었을 뿐 그 자체가 하나의 폭동이었다고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반면, 다수의견을 낸 이영섭(당시 대법원장), 주재황, 한환진, 안병수, 이일규, 나길조, 김용철, 유태흥 등 8명의 대법원 판사는 "내란죄에 있어 국헌문란의 목적은 현행의 헌법 또는 법률이 정한 정치적 기본조직을 불법으로 파괴하는 것을 말하고 구체적인 국가기관인 자연인만을 살해하거나 그 계승을 기대하는 것은 이에 해당되지 않으나 반드시 초법규적인 의미는 아니라고 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헌문란의 목적은

다만 미필적 인식만 있으면 족해”

 

이어 "공산, 군주 또는 독재제도로 변경하여야 하는 것은 더욱 아니고, 그 목적은 엄격한 증명사항에 속하고 직접적임을 요하나 결과발생의 희망·의욕임을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없고, 또한 확정적 인식임을 요하지 아니하며, 다만 미필적인식이 있으면 족하다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폭동이라 함은 다수인이 결합하여 폭행·협박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다수인의 결합은 어느 정도 조직화될 필요는 있으나, 그 수효를 특정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폭동의 내용으로서의 폭행 또는 협박은 최광의의 것으로서 이를 준비하거나 보조하는 행위를 총체적으로 파악한 개념"이라고 판시했다.

 

대법원이 김 부장의 혐의를 내란목적 살인죄로 확정한 지 나흘 만인 1980년 5월 24일 정부가 형을 집행, 김 부장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8대6으로 ‘내란목적’ 확정

 나흘 뒤 김재규 사형집행

 

당시 대법원 전합 판결에서 소수의견을 냈던 대법원 판사 6명의 운명도 이후 험난했다. 10·26 사건 이후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거머쥔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1980년 8월 이들 6명의 대법원 판사들에게 사표를 쓰게 해 의원면직 형태로 법원을 떠나도록 했다. 양병호 대법원 판사는 사표 제출을 거부하다 악명 높은 서빙고 분실로 연행돼 모진 고초를 겪기도 했다.(사법부,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한홍구)

 

이영섭 7대 대법원장은 81년 임기 도중 물러나면서 퇴임사에 사법부(司法府)를 사법부(司法部)로 표현하며 "회한과 오욕만이 남았다"고 썼다.

 

다수의견을 냈던 8명 가운데 유태흥, 김용철, 이일규 대법원 판사는 훗날 대법원장으로 임명됐다.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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