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국회,법제처,감사원

국회 회기 결정 안건에도 '필리버스터' 가능할까

법조계·학계, "회기 결정 안건도 무제한 토론 가능" 의견 많아
"필리버스터 제도 취지상 맞지 않아" 반대 의견도

임시국회 회기를 결정하는 안건에 대해 필리버스터(filibuster, 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방해)가 가능한지 여부를 놓고 여야 간에 공방이 벌어졌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신속처리대상안건(패스트 트랙)으로 지정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안과 검·경 수사권 조정 법안, 공직선거법 개정안 등의 본회의 통과를 막기 위해 '임시회 회기 결정의 건'에 대해 무제한 토론을 신청하는 전례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는 현재 국회법에 무제한 토론을 할 수 없는 안건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아 일어났다. 법조계와 학계에서는 국회법의 문언 해석상 회기 결정 안건에 대해서도 무제한 토론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대체로 많다. 그러나 필리버스터 제도 도입 취지를 고려할 때 법률안 등의 안건 뿐만 아니라 국회 회기를 정하는 안건에 대해서도 무제한 토론 허용이 허용될 경우 의정 활동이 사실상 마비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우려도 높은 상황이어서 향후 정국의 향방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122304.jpg

 

◇ 국회법상 '필리버스터 금지' 안건 없어 = 필리버스터와 관련해 국회법은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에 대해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서명한 요구서를 국회의장에게 제출해 무제한 토론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 무제한 토론이 금지되는 안건은 명확하게 정해놓지 않았다. 국회법상 '토론을 하지 않고 표결한다'고 명시적으로 규정돼 있는 것은 △본회의 공개 여부를 비롯해 △의사일정 변경 동의 △무제한 토론 종결동의 △질의·토론 종결동의 △국회의원 사직 허가 여부 등이다.

 

현재 패스트 트랙 법안 처리에 결사 반대하고 있는 한국당은 지난달 29일 본회의 직전 '필리버스터 카드'를 꺼내들었다. 무제한 토론을 통해 법안 처리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무제한 토론을 실시하는 중에 해당 회기가 끝나는 경우 무제한 토론이 종결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국회법 규정을 근거로 3~4일씩 임시국회 회기를 쪼개서 여는 '살라미 전술'로 맞대응하겠다고 나섰다. 무제한 토론 중 회기가 종료되면 해당 안건을 바로 다음 회기에서 지체 없이 표결하도록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당은 국회법의 허점을 다시 찔렀다. 국회법상 무제한 토론이 금지되는 안건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는 부분을 파고들어 지난 13일 본회의 첫 안건으로 상정될 예정이었던 '회기 결정의 건'에 대해 무제한 토론을 신청한 것이다. 필리버스터를 무력화하기 위한 민주당의 '쪼개기'식 임시국회 소집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회기 결정의 건에 대한 무제한 토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한국당은 "회기 결정의 건은 명백히 토론이 가능한 안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재철 한국당 원내대표는 15일 기자간담회에서 "(회기 결정의 건에 대한 필리버스터 신청은) 민주당이 사나흘짜리 '쪼개기 국회'라는 꼼수를 썼기 때문"이라며 "민주당이 30일 간의 임시회 개최에 동의한다면 본회의에서 회기 결정의 건에 대해 무제한 토론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심 원내대표는 "(문 의장이) 국회법을 어기고 일방적으로 회기를 결정한다면, 우리는 바로 문 의장을 직권남용과 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고발할 것"이라며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고, 국회에 문 의장 사퇴촉구결의안을 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도 같은 날 기자간담회에서 "애초에 '무한 되돌이'를 반복 허용하는 회기 결정의 건에 대한 필리버스터 신청 허용은 원리적으로 모순"이라며 "원천적으로 회기 결정의 건에 대한 필리버스터는 인정할 수 없다"고 응수했다. 한국당 주장대로 회기 결정의 건에 대해 무제한 토론이 허용되면 임시국회 본회의마다 최장 30일 간의 무제한 토론이 계속돼 사실상 국회가 마비되는 상황이 초래된다는 이유에서다.

 

◇ 법조계, "회기 결정의 건도 무제한 토론 가능" 의견 우세 = 법조계와 학계에서도 회기 결정의 건에 대한 무제한 토론 가능 여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가능하다'는 쪽이 우세하다. 국회법상 무제한 토론 금지 안건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은 한 회기 결정의 건에 대해서도 무제한 토론이 가능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회에서 근무했던 한 대형로펌 변호사는 "법 해석의 기본은 문언적 해석"이라며 "원칙적으로 필리버스터 제도는 회기 결정이 아니라 법률안 등에 대해 하도록 도입된 것이어서 제도 취지에 맞지 않는 측면이 있지만, 국회법을 문언적으로 해석하면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이 필리버스터 대상이기 때문에 회기 결정의 건도 무제한 토론이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문언적 해석을 뛰어넘으면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인 만큼, 문언적 해석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며 "필리버스터가 안건 처리를 막는 제도이다보니 결국 한국당의 의도대로 패스트 트랙 법안 처리를 막는데 성공한 셈"이라고 평가했다.

 

황정근(58·사법연수원 15기) 법무법인 소백 변호사도 "국회법상 지금은 무제한 토론이 금지되는 안건 관련 규정이 없으니 회기 결정의 건에 대해서도 필리버스터를 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다만 황 변호사는 "예산안이나 예산부수법안에 대한 무제한 토론이 12월 1일에 종결되도록 한 것처럼 필리버스터 제도를 도입할 때 회기 결정의 건도 무제한 토론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규정했어야 하는데,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며 "회기가 끝나면 무제한 토론이 종결된 것으로 간주하고 해당 안건은 다음 회기에 표결하도록 한 점을 고려할 때 회기 결정의 건을 무제한 토론 대상에서 제외하는 규정을 명시적으로 국회법에 두는 게 맞다"고 덧붙였다.

 

국회입법조사처장을 지낸 임종훈 홍익대 법대 초빙교수도 "국회법상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이 무제한 토론 대상이고, 무제한 토론을 할 수 없는 안건은 국회법에 따로 정해져있지 않다"며 "국회법상 명문으로 토론하지 말라고 규정된 의사일정 변경의 건이나 오랜 국회 관행에 따라 토론하지 않는 인사 관련 안건 이외에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이라면 모두 무제한 토론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회기 결정의 건의 경우 국회법상 명문이나 관행으로 토론이 금지돼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회기 결정의 건에 대해 토론이 이뤄진 선례가 있고, 토론이 가능한 안건이라면 무제한 토론도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는 게 임 교수의 주장이다. 실제로 2013년 9월 2일 국회 본회의 당시 통합진보당 소속 김미희 의원은 같은 당 소속인 이석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처리 중단을 호소하기 위해 정기국회 회기 결정의 건에 대해 토론을 신청했고, 강창희 국회의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특히 그는 "한국당이 회기 결정의 건에 대해 무제한 토론을 신청한 이유는 회기 결정 자체를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민주당 주장처럼 회기를 쪼개기 식으로 정하지 말고 헌법상 정해진 임시국회 회기 30일을 보장하자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필리버스터를 30일 동안 이어가면 다음 회기가 돼서야 이전 회기를 결정하게 돼 '회기 결정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주장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30일 간 필리버스터를 이어가기는 어렵다"며 "과거 민주당도 테러방지법 처리를 막기 위해 9일 간 필리버스터를 했는데, 한국당도 실제로는 20일을 넘기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이라 불리는 지난 2012년 국회법 개정에 따라 필리버스터 제도가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실제로 필리버스터가 이뤄진 사례는 2016년 2월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이 테러방지법 제정안 처리를 막기 위해 9일 간 무제한 토론에 나섰던 게 유일하다.

 

민주당 보좌진 출신의 한 변호사도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고 국회법은 판례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선례에 구속되는 경우가 많은데, 회기 결정의 건에 대해 토론을 했던 선례가 있다면 무제한 토론도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며 "실제로 회기 결정의 건이 본회의에 상정되면 이의 여부를 물은 뒤 의결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무제한 토론 대상이 된다고 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 "필리버스터 제도 취지상 맞지 않아" 반론도 = 반면 다수당이 일방적으로 법안 등의 안건을 처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된 필리버스터 제도 취지를 고려할 때, 회기 결정의 건은 무제한 토론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

 

한국입법학회 회장을 지낸 홍완식 건국대 로스쿨 교수는 "필리버스터 제도의 목적을 고려해 안건의 실질적인 내용으로 따져보면 회기 결정의 건은 필리버스터 대상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며 "국회법에 필리버스터를 금지하는 안건에 대한 명백한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모든 안건에 대해 무제한 토론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회 회기 결정은 국회법 제7조 1항(국회의 회기는 의결로 정하되, 의결로 연장할 수 있다)에 따른 것으로, 필리버스터 관련 규정은 법안이나 예산안·기타 의안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는 국회법 제6장 '회의(제72조~제114조의2)'에 위치하고 있다"며 "국회법상 필리버스터 관련 규정의 조문 위치나 필리버스터 제도의 목적·내용 등에 따라서 볼 때 국회 회기 결정의 건은 무제한 토론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홍 교수는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의 찬성으로 무제한 토론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한 규정이나 회기가 끝나면 무제한 토론이 끝난 것으로 간주하고 해당 안건을 바로 다음 회기 본회의에서 표결할 수 있도록 한 취지는 소수당에 의안 통과를 막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동시에 다른 면으로는 다음 회기에서는 결론이 나도록 해 다수당에 의안 처리를 진전시킬 수 있는 권한을 함께 부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기본적으로 국회 절차가 가능한 방향, 생산적인 방향으로 국회법을 해석해야 하지, 무작정 막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라며 "어떤 제도라도 목적을 갖고 있는데, 이번 회기 결정의 건에 대한 필리버스터는 목적을 상실한 채 규정만 놓고 따져 불필요한 논란이 발생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국회에서 일하고 있는 한 변호사도 "필리버스터 제도 취지를 봤을 때 회기 결정의 건이 필리버스터 대상이 돼야 하는지 의문"이라며 "의견 개진을 위해 잠깐 몇 분의 시간이 주어지는 일반 토론과 무제한 토론은 엄연히 다르다"고 비판했다. 특히 그는 "한국당이 대단히 획기적인 아이디어라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범죄행위가 해서는 안되는 일이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처럼 탈법도 하지 못해서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해서는 안되는 일이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라며 "이번에는 패스트 트랙 법안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 향후에도 이런 식으로 의정 운영을 하는 것이 옳은지 묻고 싶다"고 꼬집었다.


◇ 文의장 어떤 결단 내릴까 =
이번 사태와 관련해 국회사무처는 지난 13일 국회 출입기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통해 "국회사무처 의사국은 어떤 공식 입장도 밝힌 적이 없다"고 알린 이후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국회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변호사는 "국회법이 어느 정도 열려있는 법이다보니 실제로는 의정 운영에 따라 유권해석이 정치적으로 이뤄진다"며 "여야 모두 나름의 논리가 있지만, 선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회법상 명확하게 필리버스터 금지 대상 안건이 규정돼 있지도 않다보니 정치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지금처럼 정치권이나 전문가들의 견해가 나뉘고 있는 상황에서는 국회가 정치적으로 결정하는 수밖에 없고, 결국 문 의장의 결단에 향후 정국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것이다.


국회법 해석 문제를 둘러싼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 차제에 국회에 국회법 해석 관련 자문기구를 설치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황 변호사는 "지금처럼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거나 직권남용으로 고발을 하는 방식은 시의적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제 해결에도 도움되지 않는다"면서 외부전문가 9명으로 구성되는 가칭 '국회법자문위원회'를 국회의장 자문기관으로 설치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국회의원의 겸직이나 영리업무 종사, 의원 징계 등에 대한 자문을 위해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산하에 '윤리심사자문위원회'를 두고 있는 것처럼 국회법 해석상 이견을 해결하기 위한 기구를 두자는 것이다.

 

리걸에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