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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판례

[해외판례] ‘프랑스의 익명출산제도’에 대한 유럽인권법원의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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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프랑스는 16세기부터 관행으로 존재해온 일명 베이비 박스를 현대적인 의미로 재해석, 재규정한 민법(제326조)과 가족 및 사회 활동법(CASF)(제L. 222-6조)을 통해서, 출산하고자 하는 산모에게 자신의 “신상에 대해 익명을 요구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익명출산을 통해 출생한 자녀는 친부모를 비롯한 자신의 신상과 관련한 어떠한 정보도 알 수 없다는 점을 이유로 “뿌리를 알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해당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첨예한 입장의 차이를 보이는 프랑스의 익명출산제도에 대해서, 프랑스인 Pascale ODIEVRE(청구인)는 해당 제도가 유럽인권협약에 위반된다는 내용의 청구를 하였고, 2003년 2월 13일 유럽인권법원의 17명의 판사 중 10명은 청구의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프랑스의 익명출산제도가 유럽인권협약의 인권 규정을 위반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서, 프랑스의 익명출산제도에 대한 논쟁이 일단락되었다. 이하에서는 해당 사건을 통해 프랑스의 익명출산제도에 대한 유럽인권법원의 판단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관계

청구인(1965년 3월 23일 파리 출생)의 친생모는 프랑스의 공공원조서비스에 익명출산을 요청하면서 자녀(청구인)에 대한 친권포기에 서명하였고, 이후 청구인은 ‘미성년자 보호 및 아동의 사회적 원조에 대한 서비스’에 기아(棄兒)로 위탁되어 있다가, 4세에 ODIEVRE 부부의 완전양자(우리의 친양자와 유사)로 입양되었다.

1990년 청구인은 입양되기 전의 혈족에 대한 신상정보를 센(Seine)지역의 ‘아동을 위한 사회원조서비스’에 문의했으나, 요청 사항에 대해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듣게 되었다. 이후 청구인은 자신에게 세 명의 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미성년자 보호 및 아동의 사회적 원조에 대한 서비스(DASS)’에 형제들의 신상정보를 요청했으나, 청구인과 이들 형제와의 관계를 통해 청구인의 혈연관계를 포함한 친생모의 신상정보가 노출될 수 있다는 이유로 해당 청구는 거부되었다. 이에 청구인은 파리지방법원에 자신의 출생과 관련한 신상정보에 대해서 익명성을 철회해 달라고 요구하였고, 파리지방법원은 익명출산한 모(母)에 대한 인지청구거부와 관련한 사유는 해당 법원이 아닌, 행정법원이 관할권을 가진다고 1998년 2월 2일 판결하였다. 그러자 청구인은 프랑스를 상대로 프랑스의 익명출산제도가 유럽인권협약 제8조의 사생활 및 가족생활 보호 규정과 제14조의 차별금지 규정을 위반한다는 내용의 소를 유럽인권법원에 제기하였다.


유럽인권협약 제8조에 대한 유럽인권법원의 판결 요지

청구인의 주장은 프랑스의 사법 체계에 따라 익명출산을 통해 출생한 자녀는 모에 대한 인지청구가 제한되고, 이로 인해 자녀는 유럽인권협약 제8조가 규정하는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유럽인권법원은 해당 청구가 유럽인권협약 제8조의 사생활 및 가족생활 보호 규정에서 가족생활에 관한 부분은 해당 사항이 없으므로 사생활 보호 위반에 대해서만 판단한다고 그 범위를 한정하면서, “신상정보에 대한 접근 즉, 자신의 뿌리를 알 권리에 대한 침해라는 청구인의 주장과 관련해, 유럽인권협약 제8조는 인간 존재로서의 자아성립에 관한 권리 및 친부모의 인적 사항과 같은 중요하고, 필수적인 정보를 알 권리에 대한 법익을 보장하고 있으며, 청구인의 출생과 관련한 신상정보는 동협약의 제8조가 보장하는 사생활 영역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유럽인권법원은 해당 청구에서 나타나는 본질적 문제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뿌리를 알 권리” 및 “(익명출산으로 출생한)자녀의 생명”이라는 법익과, 다른 한편으로는 친생모의 건강을 위해 적합한 의료조건에서의 출산을 보장하는 “친생모의 익명성”이라는 법익의 충돌에 있음을 명시했다. 그리고 유럽인권법원은 언급된 두 법익이 자녀와 친생모 각각의 의사에 따라 향유할 수 있는 별개의 법익으로서, 두 법익의 조화가 쉽지 않음을 인정하였다. 또한 언급된 법익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청구인의 양부모, 친생부 또는 혈족과 같은 제3자의 이익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며, 4세에 입양되어 현재 38세인 청구인이 요구하는 친생모의 신상정보에 관한 익명성 철회는 청구인의 친생모, 양부모, 친생부 및 혈연관계의 형제자매에게 적지 않은 위험이 될 수 있으며, 이들도 유럽인권협약 제8조의 사생활 및 가족생활 보호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유럽인권법원은 “출산 시에 모와 자녀의 건강을 보호하고, 불법 낙태와 영아 유기를 방지하기 위해 차용한 방식에 대한 (국가의)재량 및 익명출산에 대한 일반적 이익이 프랑스법상 존재하며, 사생활에 대한 권리 또한 프랑스 사법 체계 내에서 보장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각 협약국은 유럽인권협약 제8조를 보장하기 위해서 사인 간의 관계를 규정할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어서 유럽인권법원은 “국가의 사법 체계 및 그 적용의 다양성에 있어서 각 협약국들이 유럽인권협약이 규정하는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방식, 즉 국내법을 결정할 수 있는 재량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모에 대한 인지청구거부를 통해 청구인은 ‘친생모와 혈족의 신상정보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이는 제3자의 이익보호라는 범위 내에서 청구인의 뿌리에 대한 어떠한 사실의 인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게다가 유럽인권법원은 “프랑스가 익명출산제도를 유지하는 동시에 뿌리를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익명출산으로 출생한 자가 출생과 관련한 신상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2002년 1월 22일 법’을 제정하였으므로, 청구인은 친생모의 동의하에서 본인의 신상정보에 대한 익명성 철회를 요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아, 프랑스가 앞서 제기된 법익들 사이에서 균형유지를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이해하였다.

궁극적으로 유럽인권법원은 “양부모, 친부모 및 나머지 혈연관계에서 각 개인이 가진 권리에 비추어, 익명출산으로 출생한 자녀의 신상정보에 대한 익명성 철회와 같은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에 대한 판단의 한계범위를 프랑스가 초과하지 않았으므로, 제기된 프랑스의 익명출산제도가 유럽인권협약 제8조의 사생활 보호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유럽인권협약 제14조에 대한 유럽인권법원의 판결 요지

청구인은 프랑스의 익명출산제도로 인해 친생모와의 친자관계가 성립될 수 없고, 이러한 친자관계 불성립으로 인해 친생모의 재산에 대한 자신의 상속권이 제한받는다는 점에서 유럽인권협약 제14조의 차별금지에 대한 위반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유럽인권법원은 “청구인의 주장은 이미 동협약 제8조를 통해 제기된 사항과 동일하며, 프랑스의 익명출산제도로 인한 친자관계 불성립과 상속권 제한에 유럽인권협약 제14조가 금지하는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다. 유럽인권법원은 이에 대한 근거로 “청구인은 양부모와 친자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따라서 양부모와의 양친자 관계를 통해 상속 및 재산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는 점을 제시했다.


마치며

프랑스에서 익명출산을 통한 출생자의 수는 최근에도 매년 약 600명 이상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익명으로 출산하고자 하는 여성에 대해 단순히 출산비용만이 아니라 출산 전·후의 거주 및 생활과 관련한 비용을 비롯해 출산 후의 취업에 대한 보조에 이르기까지 익명출산을 선택한 산모에 대한 지원을 보장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익명출산을 결정한 친생모나 친생부가 본인들의 신상정보에 대해 익명성을 철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으며(가족 및 사회 활동법 제L. 147-3조, 제L. 147-6조 및 제L. 224-7조), 친생부가 익명출산으로 출생한 자녀에 대해 인지청구를 할 수 있도록(민법 제62-1조) 함으로써 익명출산을 통한 권리 침해를 보완하는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다.

프랑스의 익명출산제도에 대한 유럽인권법원의 판결 이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익명출산제도에 대한 찬반 논쟁은 프랑스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해당 판결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메시지는 청구인이 주장하는 “뿌리를 알 권리”는 “‘익명출산’으로 안전하고 건강하게 출생할 수 있었던 청구인의 생명권”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안문희 연구위원 (사법정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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