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국회,법제처,감사원

“피해자 인적사항 모르더라도 합의 위한 형사공탁 가능하게”

‘공탁법 개정안’ 국회서 2년째 방치

성범죄 등에서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모르더라도 합의를 위한 공탁이 가능하도록 형사공탁 특례를 신설하는 내용의 공탁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됐지만, 여야간 정쟁으로 인한 국회 공전 등으로 법개정이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어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 특례 신설의 필요성을 주장해온 법조계는 "터질 것이 터졌다"며 빠른 개선 입법을 주문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최영애)는 최근 성폭력범죄 피해자의 배우자인 A씨가 "법원이 가해자 측 변호사에게 피해자 인적사항이 적힌 사건기록을 복사해줘 신상정보가 유출됐다"며 B지방법원 직원을 상대로 낸 진정을 받아들였다. 이 사건은 성폭력범죄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제대로 익명처리하지 않은 채 법원이 가해자 측에 사건기록 사본을 교부했는데, 가해자 측 변호사가 비실명화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이 같은 사건기록을 활용해 합의금을 공탁하면서 불거졌다.

 

54323456.jpg

 

인권위에 따르면 지난 2017년 8월 A씨는 법원이 보낸 공탁금통지서를 받았다. 통지서에는 A씨 배우자의 주소와 주민등록번호 등 인적사항이 모두 기재돼 있었다. 놀란 A씨는 가해자 측 변호사인 C씨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소하려 했다. 그런데 "적법한 절차에 따라 B지법에서 사건기록을 복사한 것"이라는 C변호사의 해명에 A씨는 C변호사를 고소하는 대신 인권위에 진정을 냈다.

 

인권위 조사 결과 C변호사 사무실 직원이 B지법에서 사건기록을 복사받는 과정에서 피해자인 A씨의 배우자의 인적사항이 그대로 기재된 사본을 받았고, C변호사는 이후 사본에 적힌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보고 가해자 명의로 공탁금신청서를 작성해 법원에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인권위는 "법원 담당자의 부주의로 피해자의 신상정보를 가해자가 쉽게 알 수 있는 상황에 놓여 피해자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가능성이 있었다"면서 "피해자 인적사항 노출로 피해자의 개인정보자기결정권 및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가 침해됐다"며 B지방법원장에게 해당 직원에 대한 주의 조치 등을 권고했다. 인권위는 또 "법원 담당자의 행위가 개인의 부주의에서만 비롯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법원행정처장에게 "재판기록 열람·복사 규칙 및 예규 등을 개정해 성폭력범죄 피해자의 신상정보를 비실명 조치하도록 명문화하는 등 관련 절차 및 규정을 정비하라"고 주문했다.

 

2017년 5월·10월,

여야 의원 각각 ‘특례규정 신설’ 발의

 

형사사건에서 피해자와의 합의나 피해보상을 위한 공탁 여부는 양형에 반영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현재 시행중인 양형기준은 성범죄나 살인·강도범죄 등의 사건에서 가해자의 '상당 금액 공탁', '진지한 반성' 등을 감경요소로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여기서 '상당 금액 공탁'이란 '피해회복을 위한 진지한 노력을 하였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여 상당한 금액을 공탁한 경우'를 의미한다. 성범죄의 경우 상당 금액 공탁 여부는 집행유예 참작사유에도 포함돼 있다.

 

문제는 공탁법상 공탁을 하려면 공탁서에 피공탁자(피해자)의 이름과 주소, 주민등록번호 등 인적사항을 기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민사공탁은 피공탁자의 인적사항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반면, 형사공탁의 경우 피공탁자인 피해자가 성범죄 피해자이거나 특정범죄신고자 등 보호법에 의해 보호되는 경우 익명처리되기 때문에 인적사항을 알기 어렵다. 피해자의 인적 사항을 알아내 합의를 종용하거나 협박하는 등 가해자에 의한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조치이지만, 피해자가 합의를 거부하는 경우 피해자 인적사항을 몰라 공탁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법사위의 검토 보고서에서도

“필요성 인정” 긍정적 평가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피해자 인적사항 없이도 형사공탁이 가능하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황정근(58·사법연수원 15기) 법무법인 소백 변호사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공탁할 수 있는 길은 열어둬야 하는데, 입법 미비로 볼 수 있다"며 "피공탁자(피해자)의 신상정보를 모르더라도 사건번호 등으로 특정해 공탁이 가능할 수 있도록 공탁법에 특례규정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에는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알지 못하더라도 사건 담당 법원과 사건번호 등 일정한 정보를 활용해 가해자가 형사공탁을 할 수 있도록 '형사공탁 특례' 규정을 신설하기 위한 공탁법 개정안이 계류돼 있다. 2017년 5월 더불어민주당 박경미 의원이 발의한 법안과 같은해 10월 자유한국당 곽상도(60·15기) 의원이 발의한 법안 등 2건인데, 내용은 비슷하다. 

 

법사위 검토보고서는 두 법안에 대해 "피해자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피해 회복을 위하는 동시에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사죄를 표할 기회를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두 법안 모두 지난해 9월 1소위에서 한 차례 논의된 이후 아직까지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9월 1소위서 한차례 논의 후

아직까지 ‘답보상태’

 

법사위 관계자는 "여야 모두 법 개정 취지에 공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법원과 법무부 간에도 의견 차이가 크게 없는 사안"이라며 "대법원·법무부에서 의견을 받아 수정안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올 상반기 중에는 통과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대형로펌의 한 변호사는 "국민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 같은 법안을 2년이 다 되어가도록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라며 조속한 처리를 주문했다.

 

한편 법조계에서는 형사공탁 특례 규정이 도입될 경우 가해자의 '형사공탁 악용'을 막기 위한 장치가 함께 마련돼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가해자가 피해 회복을 위한 진지한 노력보다는, 피해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유리한 양형만을 위해 형사공탁을 악용할 우려도 있다"며 "공탁에 대해 피해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등 보완 장치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변호사